된장 항아리에 담긴 농촌의 희망-지평농협 ‘정월장 담그기’가 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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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바람이 맑던 봄날, 양평 지평면에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장독 뚜껑이 열렸다. 지평농협의 ‘정월 장(醬) 담그기’ 행사가 24번째 봄을 맞은 것이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해 보고 나면 다시 오지 않을 수 없다는 이 행사에는 서울, 경기, 충청에서 수백 명이 발걸음을 모은다. 된장과 간장을 직접 담그고, 흙 냄새 묻은 장독대 곁에서 투호와 윷놀이로 웃음을 나누는 풍경.
그 한 장면 속에, 우리 사회가 잊어가던 ‘음식의 뿌리’와 ‘마을의 정서’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지평농협의 장 담그기는 단순한 체험 행사가 아니다. 그 속에는 지역농업을 살리려는 농민의 절박함과 전통의 가치를 지키려는 공동체의 의지가 배어 있다.
100% 국산 콩과 천일염, 직접 말린 메주와 대추, 고추, 숯을 사용해 항아리에 정성을 담고, 두 달 뒤 ‘장 가르기’로 간장과 된장을 나누는 이 과정은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속도에서 한 걸음 물러서 ‘기다림의 미학’을 되새기게 만든다.
놀라운 것은 이 소박한 문화가 농촌의 경제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2022년 21억 원이었던 장류 매출은 올해 30억 원을 넘어섰고, 지평과 양동면에서 계약 재배된 국산 콩 사용량도 해마다 늘고 있다.
좋은 재료로 건강한 음식을 만든다는 신뢰, 그리고 농협이 종자 선택부터 수매까지 책임진다는 믿음이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를 서로 잇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평농협의 장은 2023년 대통령실 추석 선물에까지 선정됐다. 그 자체로 지평면이 가진 전통문화와 품격을 증명한 셈이다.
전통 장 담그기 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며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그 문화가 지속가능한 경제모델로 정착되는 곳은 많지 않다.
지평은 그 귀한 사례가 되고 있다. 도시에서야 국산 된장 하나 고르기도 힘든 시대다. 그런데 지평에선 이 모든 과정을 직접 보고, 만지고, 맡고, 담근다. 된장 14kg, 간장 3.6리터. 한 가족이 1년을 살아가는 데 충분한 양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영양만이 아니다. 기다림의 시간, 흙 냄새 나는 마을의 풍경, 나눔과 정성, 농촌의 땀방울이 장 한 그릇에 차곡차곡 스며든다.
우리는 지금, 빠른 것만을 선호하며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 중 가장 본질적인 것이 바로 ‘음식의 문화’이자 ‘사람의 정서’다.
지평농협의 장 담그기 행사는 그 잃어버린 가치를 다시금 회복하게 하는 작은 실천이다.
도시의 소비자들은 여기서 한 그릇의 전통을 맛보지만, 농민들은 여기서 한 해의 생계를, 그리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준비한다. 음식은 삶이고, 전통은 미래다. 된장 항아리에 담긴 농촌의 희망이 더 멀리 퍼져나가길 기대한다.
안병욱 (ypn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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