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재벌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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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에 걸린 아내의 속옷이 후줄근하다. 궁상떨지 말고 속옷 좀 새로 사 입으라고 했다가 된통 바가지만 긁혔다. 아내의 입에서, 삼겹살, 세제, 푸성귀, 식용유 따위의 가격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공식물가상승률은 4.3퍼센트인데 아내의 목소리는 430퍼센트쯤 높아졌다. 기특하게도 1년전 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담배 한 개비 빼들고 베란다로 나서려는 찰라, 그놈의 담배 좀 끊으라는 소리를 다시 들었다. 오냐, 남편 건강 챙기는 척 하면서 담뱃값마저 털어갈 속셈이냐, 부르짖었다. 물론, 속으로.
아들놈 앞세우고 은행에 갔다. 학자금 대출이라는 걸 받았다. 돌아오는 길 내내 인상이 펴지지 않았다. 남들도 다 받아요, 아버지. 아들놈 말에 심하게 울컥했다. 애비 속 헤아릴 만큼 자라준 게 고맙고 대견해서 울컥했고, 군대도 아직 못간 어린놈을 벌써 빚쟁이로 만들 수밖에 없는 게 초라하고 서글퍼서 울컥했다. 그리고, 온갖 앓는 소리로 돈 꿔가고는 연락을 끊은 20년 지기에게, 원유가 상승은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 원유가 하락은 지렁이 담 넘듯 반영하는 정유사에, 날이면 날마다 치고 박다가 저희들 월급 올릴 때에는 부랄 친구 저리가라 다정해지는 정치판에, 정책이라곤 맨 바람 잡는 소리에 대책이라곤 맨 헛소리만 늘어놓는 정부에게 심하게 울컥했다.
국민의 사정을 보살피는 척하면서 철저한 표계산에 입각한 정책만 남발하는 정치판에 넌더리가 난다. 국민기업입네 글로벌기업입네 떠들면서 세금포탈과 이윤추구에만 여념이 없는 경제판에도 넌더리가 난다. 각기 상반된 진단과 해법을 내놓는 경제학자들의 소리도 넌더리가 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주 소박하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고 낭비와 사치를 멀리하면, 서넛 모인 점심값에 구애 받지 않고 빨랫줄에 내걸린 아내 속옷이 후줄근하지 않고 아들놈 등록금에 빚내지 않아도 좋은 삶이다. 이 정도의 삶이 낙원의 삶처럼 아득해 보이니, 수입차와 명품소비재 판매가 급등하고 있다는 소식은 환청과 다름없다.
서민을 따듯하게, 중산층을 두텁게. 한때, 집권당과 청와대, 지자체와 공공기관 벽면을 처발랐던 저 구호는 이제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구호라는 게 참 허망한 말장난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경제부흥을 표방한 각종 세제개편은 재벌과 부자를 더욱 살찌웠을 뿐이다. 재벌과 부자는 더욱 따듯해졌고, 수치상의 중산층에 간신히 턱걸이하고 있는 국민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세상사에 두려움만 커져갈 뿐이다. 수치상의 중산층에서도 밀려난 국민들은 그야말로 이판사판으로 살아가는 게 유일한 삶의 방식으로 굳어버렸다.
물가를 잡겠다는 정부의 장담은 물론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한 여름 햇살은 눈이 부신데,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피서비용으로 월동용품이나 사두는 게 현명한 짓일 것 같다.
안병욱 (ypn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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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엘로님의 댓글
엘로 작성일얼마전 해외에서 사업하시는 아버지께서 한국에 잠깐 들어오셨을때
"해외는 물질적으로 고생은 안하지만.....
....외롭다..."며 소주잔을 기울이셨던 아버지께 외롭지 말라며 하모니카 하나를 사드렸던
생각이 납니다.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맘껏 기조차 피지 못하고 사는 무거운 대한민국 50대 가장들의 그 무거운 어깨를 다시 짊어드리게 하고 싶지않아,
그래도 건강도 챙기고 특별한 걱정없는 해외에서 몸조심히 건강하게 지내라고 했던, 눈물이 났지만 눈물을 머금은 울컥했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이곳 저곳,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무거워 보이는 우리나라 아버지들, 어머니들,
언제쯤 그 기본적인 평범한 낙원의 세계가 대한민국에서 연출될까요.
아주 평범한 꿈이, 마치 큰 사치인듯한 현실이 원망스럽습니다....
두리봉님의 댓글
두리봉 작성일푹푹찌는 무더위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시원한 팥빙수 한사발 먹은 듯한 기분이네요...
속이라도 시원하게 해줘서 고맙슴다.
앞으로도 이런글 많이 게재해 주길 바랍니다.
건강 유의 하시고.....
강상면님의 댓글
강상면 작성일그래도대출자격은돼십
니다
그것도안되는사람이더많습니다
가진것도없고 직장도없고
근대
아들놈은똑똑하다는생각이들고
이것이
실직자부모의
쓰린심정 죽고싶은심정입니다
양평님의 댓글
양평 작성일빈대같은 카지노 선전꾼을 잡아야 한다.
박수정님의 댓글
박수정 작성일나이가 60이 훨신 넘었는데 그동안 세상에 마음편하게 물가걱정 정치걱정 아니 세상걱정 안하고 살아온적이 있었나 ? 윗글을 보면서 생각해보니 한번도 없었던것 같다. 밤낮 내일은 조금나지리라 생각하면서 살아왔고,다음 정권이 바뀌면 또,조금나지리라 생각하며,살아왔는데...어렵드라도 위에서 깨끗하면 그래도 참고 기다려보겠는데. 맨터지는 돈에액수를 보면 .칼국수 점심값에 서글품을 느끼며.마누라의 후질근한 속옷을 걱정하며, 애 학자금 대출에 아이의위로에 절망하는 소시민의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는데 무슨 희망으로살아볼까? 다시한번 새마을 노래라도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