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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N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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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1-11-17 09:30 댓글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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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살을 살아도 죽음은 슬픈 일이여”-前길병원 장의사 김 영 진-

과장된 표현으로써가 아니라 정말 죽었다 살아났다는 사람이 있다. 진위여부는 지극히 불투명하다. 상식선에서 죽음이란 누구도 체험할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게 고작이다. 간접적 체험으로 죽음의 세계를 헤아리는 건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고찰은 끊임이 없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망의 영역이며 결단코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의 세계에 왜 그토록 탐닉하는 것일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은 것이며, 죽음에 대한 물음은 곧 삶에 대한 물음과 일치되기 때문이 아닐는지.
 
염장이, 죽은 이의 몸을 닦고 이승의 마지막 옷을 입혀 저승으로 배웅하는 사람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일터로 삼으니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바라보는 게 범상한 우리네 시선이다. 하는 일이 그러니까 무언가 특출난 사생관(死生觀)을 지녔으리라는 기대감도, 오죽하면 그런 일로 밥벌이할까하는 측은지심도 갖게 된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산사람도 우습게 여기는 세상에서 죽은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이 얼마나 고귀한가에 이르게 된다. 2011년 11월 14일 오전, 염장이 김영진(72세)선생을 모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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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김영진 :</font> 원, 나 같은 사람을 뭐하려 만나려 드는 거요?
<font color=green>안병욱 : </font>궁금한 게 많아서죠. 일반인들이야 이쪽 분야에 아는 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font color=green>김영진 :</font> 하기사, 사람이라는 게 배웠다고 응 다 아는 게 아니구 못 배웠다고 다 모르는 게 아니구. </b>

서두부터 예사롭지 않은 답변이다. 배웠다고 교만하지 말 것이며 못 배웠다고 주눅 들지 말라는 뜻으로, 책상물림으로 터득한 지식과 삶에서 쟁취한 지식의 높낮이를 따지지 말라는 의미로,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표현으로 새겨듣는다. 단순한 말 한마디를 괜스레 복잡다단하게 해석하는 지도 모를 일, 선생의 표현대로‘주검을 떡 주무르듯 하는’사람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라서 꽤나 긴장했나 보다.

<b><font color=green>김영진 :</font> 더듬어 보면, 난 말이지 소싯적부터 죽음과 연이 깊었어요. 명색이 3대독잔데 내 기억에는 부모가 없어요. 조실부모한 거지. 모친께서는 공흥리 밀양박씨네 분이셨는데, 육신이 변변치 않아서 강상면으로 시집 갔다가 나 하나 떨궈놓곤 다시 친정살이를 하셨답디다. 내가 여섯살 때, 아궁이 불이 치마에 옮겨 붙어서 화마로 이승을 하직하셨지. 그 기억만은 선명해요. 모친 생김새는 깜깜한데, 상여 꾸미는 모습이랑 상여꾼 북을  두들기면서 놀다가 어른들한테 혼꾸녕이 난 기억들은 어제처럼 생생해.

부친도 회상할 꺼리가 없긴 매일반이에요. 아무개네 사랑방에서 돌아가셔서 가마떼기에 둘둘 말아 산소를 썼다는 말만 친가쪽 인척에게 들었지. 커서, 부친 산소자리라도 찾으려 끌탕을 했는데, 생김새가 좋았던 사람이며, 저기 대성리 아무개네 머슴이었다는 거, 주인집 딸내미랑 정분이 나서 둘 다 쫓겨나 서울 가서 살다가 사두창을 앓아 두 다리를 절단했다는 거, 거기 강가에서 죙일 주낚질로 호구지책했다는 거, 남의 사랑방에서 애 하나 낳고 살다가 게서 운명을 달리 했다는 풍문과 다를 바 없는 말만 주어들은 게 다여.

다른 건 몰라도, 배는 제각각이라도 씨는 하나라 내 피붙이 찾으려 애도 썼지. 어찌어찌해서 부친 둘째 부인이 구씨 성 가진 이에게 재가하면서 딸려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지. 서울 왕십리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더만. 돈 몇푼만 손에 쥐면 소고기라도 한 칼 사서 찾아보련다, 작정했는데 말여. 그게 또 못 이룰 소망이 되고 말았구. 내가 어려서는 땔낭구 져오는 게 일이었어. 해 뜨면 용문산에 올라설랑은 나무 한 짐 해서 해가 뉘엿하면 돌아오곤 했는데, 하루는 뾰족하게 부러진 나무둥치에 엎어져서 다리를 크게 상했지. 그 때가 열여섯 되던 해였는데, 이날 입때껏 꼼짝없이 불구가 돼버린 연유인 거여. 가재 잡으러 나온 이웃 형뻘되는 이가 업어서 구들장에 던져놓은 이후론 살길이 막막했지. 그 당시만 해도 한 입 밥 멕이는 게 오죽 큰일이던가. 나 좀 살려 달라, 배 다른 피붙이에게 편지를 보냈지. 내가 글도 못 깨우쳐서 남의 손으로 써 보낸 편지에 답장이 왔는데, 다시는 이딴 편지 보내지도 말고 찾을 염도 내지 말아라 그리 답신이 왔더란 말이지, 허허… </b>

김영진 선생은 실타래 풀어내듯 유년의 기억들을 펼쳐낸다. 듣는 사람은 저도 모르게 끌끌 혀를 차도록 처연한데 마치 남의 일 말하듯 심상한 낯빛이라 껴들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머리만 주억거리며 선생의 입만 쳐다볼 밖에는.

<b><font color=green>김영진 : </font>그런 일이 있고 몇 해 지나서 양평에 20사단이 들어오더군요. 불편한 다리 질질 끌면서 땔낭구 해다 팔아서 한푼두푼 여투어서 남의 집 행랑에 구멍가게를 차렸지. 8촌 동생이랑 맞보고 살았는데, 동네에 좀 배운 양반 하나가, 네들 이렇게 까막눈으로 살다간 평생 좋은 꼴 못 본다면서 언문을 가르쳤어요. 다 저녁에 짠지죽 한 그릇 비우곤 그 양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글을 배웠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여? 겨우겨우, 쓰지는 못하고 뜨문뜨문 읽는 정도에서 작파했지. 그래도 사람은 다 살기 마련이라고, 글을 모르니까 머리는 비상해지대. 글로 옮겨 적을 재간은 없었지만, 내 가게에서 외상 먹은 사람 이름 석 자는 물론 몇날 몇시에 소주 몇 병 갖다 먹고 성냥 몇 통 빚졌는지는 1년이 지나도 머리에 콱 벡혀서는 잊히지가 않더라 이거죠. 그 때가 말여, 양평시장에서 됫박으로 성냥 팔던 시절이었어. 좌우당간, 그래서 외상값 놓친 적 없이 구멍가게 꾸려가며 그냥저냥 살아내려왔어요.

손님 없는 구멍가게 퍼질러 앉았다가 누가 우리 밭 좀 매주렴 하면 몇푼 받고 나서고, 근방에 남의 밭이라면 안 매본 데 없이 지팡이 짚고 싸돌아다니며 살았지. 아, 그러다가 하루는 퍼뜩 정신이 들대. 남들은 다 군대 가고 그러는데 난 왜 군대 가라는 소리가 없나, 그래서 내 여기저기 알아 봤지. 그랬더니 아 참내, 집안 어른들이 내 호적도 안 올려놓은 거죠. 그러니 국민학교 들어가라는 전갈이 오겠어, 군대 가라고 영장이 나오겠어. 당시에 가설극장도 열고 대서소도 하던 이북 사람이 한 분 기셨는데, 그 양반이 우리 집안 장손 며느리랑 정분이 났었걸랑. 6.25 때 지아비가 학살당해 홀로 되신 분이었는데, 그래도 집안에서 난리가 났었지. 여하튼, 그 이북 양반이 ‘내가 너한테 딴 건 못 해줘도 호적 하나는 만들어주마’ 하더니 기어코 내 호적을 올려주셨어. 그 덕분에 스물다섯 되던 해에 남들보다 늦잖게 버젓이 장가도 들게 됐지, 뭐.</b>

땔나무와 행랑살이, 동네 머슴, 無호적, 가설극장, 됫박으로 파는 성냥, 6.25와 학살… 따져 보면 불과 반세기 전 이곳 양평에서의 삶인데 전설의 고향처럼 까마득한 시절로 들린다. 선생의 회상 속에서 등장하는 지인들의 이름 가운데에선 필자도 기억하는 이름들이 드물지 않다. 어찌 보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끽 해야 17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세월의 기억들이 어쩌면 이토록 명암이 다른 것일까. 회상에 젖은 선생의 말은 쉼이 없는데, 염장이로 접어드는 대목은 좀체 나타날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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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 안병욱 : </font>고생이 참 많으셨네요. 그런데 어떤 계기로 염장이 일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font color=green>김영진 : </font>안 그래도 지금부터 그 사연을 얘기하려고 했는데. 원, 그 양반 성격도 급하시네. 우리 집 큰 아이가 올해 마흔 다섯인데, 중학교 1학년 무렵에 읍사무소 사회계장이 뻔질나게 우리 집을 드나들었지. 왠고하니, 공동묘지 관리를 해달라는 청탁 때문이었지. 내 대답이야 맨날, 옘병 내가 왜 송장 치우는 일을 하냐, 일 없다 싹둑 거절하곤 했어. 그래도 며칠 지나면 또 와서 똑같은 소리를 하곤 했지.

당시 말이야, 남의 논 닷마지기 지으면 벼 열 가마가 내 차지고 방앗간 가서 찧고 나면 다섯 가마가 온전한 내 꺼가 됐어요. 남의 논 닷마지기 짓기가 좀 힘들어? 근데 아들 녀석 학자금이 분기마다 쌀 한가마 값이었던 거예요. 하루는 사회계장이 전에 없던 조건을 내밀더라구요. 묘지 관리해주면 영세민으로 처리해설랑 학자금 없이 학교 보내게 해주겠다구. 가만 계산해보니까는 일 년에 쌀이 네 가마 턱이야. 사사분기로 학자금 냈으니깐. 그래서 그러마한 게 이 일에 시작인 게지.

아, 괜찮대. 장사 지내러 온 사람들이 장갑 하나 수건 한 장 담배 한 갑은 기본으로 인사치레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망자 좀 잘 모셔달라 그러면서 돈푼깨나 손에 쥐어주고 말이야. 그럭저럭 장례 치르는 일에 익숙해지니까 수입도 점점 나지더만. 글쎄 말이야, 염(殮 : 수의를 갈아입히고 베나 이불 따위로 쌈)하고 습(襲: 쑥이나 향나무 삶은 물로 시신을 씻긴 뒤 옷을 갈아입힘)하고 하는 일이 또 묘한 게 있어요. 처음엔 멋도 모르고 남들 하는 거 어깨너머로 배워 흉내 내듯이 했었는데 아, 어느 날부턴가는 이래선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대요. 나도 모르게 이 일하기 전에는 필히 목욕하고 속옷부터 쫙 갈아입으며 육신을 정갈하게 가다듬게 돼고 한참 동안이나 눈 감고 내 나름대로 뭐랄까 정신수양 같은 걸 하게 되더라 이거죠. 더럽게 살아온 인생이든 천사처럼 살아온 인생이든, 천수를 누린 호상이든 억울하게 식어버린 악상이든, 죽은 이한테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체온이 내 것이 아니겠어요? 이왕이면, 이승에서의 마지막 손길을 더 따사롭고 정성되게 바치는 게 내 할 도리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거죠.
 
그러다가, 82년 6월 16일 길병원이 문을 열었지. 거기 영구차 기사가 사무실도 열어놓고 장례 일을 봤는데, 하루는 내가 하관식(下棺式 : 관을 무덤에 내리는 의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단 이 말이지. 식이 끝나니깐 슬그머니 와서는 내일 차나 한 잔 합시다, 그래. 그러자구 그랬죠. 내가 그 때 처음 다방이라는 데를 가봤어요. 어따, 아가씨가 턱하니 차도 갖다 주고 담배도 빼내서는 입에 물려주고 하대요. 내 생전 첨으로 그런 호강을 다해봤네. 차 마시고 났더니 밥도 먹읍시다 그래. 잘 얻어먹고 이빨 쑤시고 있는데 그 양반이 이러더만, 김형 나랑 밥 같이 먹고 삽시다, 아, 이러더라구. 그때부터 여기 영안실이 내 밥그릇이 되었지. 그땐 참 교통사고가 많았어. 맨 오토바이 사고로 들어오곤 했는데 흉칙했어요, 진짜. 나야 뭐 가릴 게 있었나, 어떤 시신이든 극락왕생 하소서, 하는 마음으로 시신 닦아드리고 옷 챙겨 입혀드리고 그런 거야. 

<font color=green> 안병욱 : </font>시신을 모시는 일이 다 특별나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경우도 많으셨죠?
<font color=green>김영진 : </font>많다 마다지. 참혹할수록 기억에 깊은데, 예전에 우리 예식장 뒤에 아파트 지을 때 얘긴데 참 참혹했어요. 거기 임시사무소 같은 가건물에서 인부 몇이 화투를 쳤는데, 어떤 썩어문드러질 놈 하나가 부아 좀 난다고 밖에 나가설랑 휘발유를 사들고 와서는 화투판에 끼얹고 불을 당겨버렸단 말이지. 세 사람이 그 자리에서 홀라당 타 죽었는데 어떻게 분간을 해? 새까맣게 오그라들었는데. 근데 그 참 희한한 일도 다 있대. 망자의 어머니 되는 분이 찾아와서는, 우리 얘가 생전에 그렇게 500원짜리 동전을 좋아라 했다는 거예요. 아닌 게 아니라 찬찬히 살펴보니 시신 한 구 허벅지께에 눌러붙은 500원짜리 동전이 있더란 말이지. 아마, 주머니에 부적처럼 챙겨 넣던 동전이 그리 된 듯싶은데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시신 한 구는 수습이 되었죠. 나머지 시신은 몸피가 실하고 빈약한 걸로 판명을 해서 장사를 치뤘구요.

언제였던가, 아주 몹쓸 놈의 일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살인사건이야. 동부장 앞에 어떤 민가에서 일어난 일이였는데 그 나쁜 놈의 자식이 열여섯 먹은 계집아이를 죽여서는 지네 집 농 옆에 숨겨놓았더란 말이지. 형사들이 시신을 내려주고 내가 받아 내리는데 갑자기 시신에서 피가 쏟아져서 나를 덮치더라구. 그땐 정말 식겁을 했죠. 오만 정이 다 떨어졌는데 담배 한 대 피우고 나니까 마음이 가라앉대요. 그래, 오죽 억울했으면 그랬을까, 이 꽃봉오리 같은 나이에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아무 상관없는 나한테 해꼬지를 다 할까, 내 이렇게 마음먹고 지극정성으로 모셨단 말이지.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용문사 위턱 산에서 생긴 일인데, 그때는 그 근방에 텐트 치고 놀다가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이름난 좋은 회사에 다니던 처녀가  급살을 당했는데, 가서 보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금방 알겠더라 이거죠. 정분난 총각이랑 거기에 놀러와서는 이슥한 밤에 텐트 안에서 옷가지를 벗으려는데 바위가 굴러 내려와 머리통을 후려갈긴 거던만. 그러니깐 절 가까이에서는 절대 그런 요사스런 짓을 하면 안 되는 건데. 망자한테는 차마 이를 말이 아니긴 하지만 허고 많은 데 다 놔두고 왜 그런 데에서 그런 짓을 하려고 했는지 참내… 근데 총각 녀석은 멀쩡했단 말이지. 바윗덩어리가 살짝 스쳐가서 이마빡 약간 긁힌 거 말고는 쌩쌩했죠. 그러면 뭐해? 처녀네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내 딸 살려내라고 치도곤을 처대서 아마 그 때 그 총각녀석 수명이 절반은 깎였을 텐데. 아 근데 그노무 불똥이 나한테까지 튑디다. 망자 고모 되는 여인네들이 다짜고짜 날 붙들고 영혼결혼식을 올려달라 울며불며 통사정을 하는 거예요. 해본 적 없다, 어떻게 하는 지 도통 모른다 해도 막무가내에요. 견디다 못해 지푸라기 모아서 허수아비 만들고 붉은 저고리에 남색 치마 사다가 입히고는, 얼굴 부분엔 연지꼰지 찍어설라무네 그 총각녀석 앞에 앉혀두고 팔자에 없는 주례를 다 봤죠. 아, 내가 여기서 별거 별거 안 해 본 짓이 없다니까요. 시신을 떡 주무르듯 하는 나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 이거죠. </b>

듣기에도 끔찍스러운 일들을 손수 갈무리해온 선생은 말끝에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호쾌한 웃음과는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냉소적인 웃음과도 거리가 멀다. 추억을 더듬는 일은 흐뭇한 일이기도 하지만 세월이 가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만나게 되는 위험도 따르는 법이다. 온갖 죽음과 직면하면서 선생은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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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김영진 : </font>죽음이라는 게, 그게 참 묘한 거예요. 갓난아기의 죽음이나 이팔청춘의 죽음이나 노인네의 죽음이나 슬픔은 하나에요. 똑같은 거죠. 백살을 살아도 죽는 건 슬픈 거예요. 그러니까, 영안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죽은 이의 주변사람에게 친절해야 해요. 슬픈 척이 아니라 진짜 같이 슬퍼하는 마음을 잃으면 안 돼요. 괜히 유세 부리고 떼떼거리는 장의사들이 혹간 있는데 그건 정말 글러먹은 짓이에요. 요즘 상조회니 뭐니 하는 사람들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수의 입힐 때에도 범절에도 없는 오만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유족들에게 돈 뜯어낼 궁리만 해대는데 참으로 목불인견이지, 암.

여자고 남자고 홀랑 벗겨놓고서는 수습을 하는데 이건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거에요. 아, 어디 감히 시신을 그리 욕되게 할 수가 있나? 자고로 여자의 주검은 여자가 수습해야 하는 거지. 세월이 아무리 속절없이 바꼈다해도 지킬 건 지켜야죠. 예전 양반집들은 여식 시집보내기 전에 염하는 법부터 가르쳤어. 시댁 여자 식구 망부에 오르게 되면 제 손으로 감당하게끔 해놓고 나서야 시집보낼 차비를 했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원래 내 집안의 염습은 내 집안 손으로 하는 게 마땅하지 않아요? 그게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고 범절이지. 제 조상이며 제 피붙이의 마지막 치장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안 그래요?  </b>

요즘 장례풍속을 겨냥한 질타가 길게 이어진다. 제 풀에 노여움까지 타신다. 어르신 노여움을 즉방으로 푸는 방법은 자식들 얘기를 꺼내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의 안면에 웃음꽃이 핀다.

<b><font color=green>김영진 : </font>못 배운 게 한이 돼서 자식들만은 어떡하든지 공부 시키려고 했지만, 큰 아들놈은 겨우 중학교만 마쳤어요. 지가 그러더라구요, 내가 이만큼 컸으니 먹는 입 하나 줄이고 동생 공부 시키겠노라고. 그래갖고는 졸업한 다음날 공장에 취직을 해버렸어요. 거까지 내가 손 붙들고 같이 갔는데 거기 공장 안에 내 자식 남겨두고 딱 돌아서는데 비 오듯 눈물이 쏟아지대. 내 평생에 흘린 눈물 다 합쳐도 그 때 그 눈물만큼은 아닐 거예요. 오냐, 내가 이를 악 물고 살아서는 나머지 자식들만큼은 하고 싶어 하는 만큼 공부를 시키겠노라 모질게 마음먹었지만 큰딸도 겨우겨우 중학교만 보냈어요. 다섯 남매를 두었는데 돈벌이는 시원치 않으니 무슨 놈의 재간이 있었겠어요? 그때야 피눈물이 났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지. 아 지금이야 다들 아들딸 낳고 제집 지니고 잘 살고 있으니까요. 효자가 별 건가요? 저희들 사람 노릇하면서 사는 게 최고지.

둘째딸은 십수년간 양평경찰서장 모셨어요. 사건사고 때마다 시신 수습하느라 낯익은 사람 덕분에 특채 비스무리하게 딸녀석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양평경찰서에 취직을 했는데, 아 얘가 전화도 잘 받고 눈치도 빠르고 행동거지도 싹싹하고 영특하기도 하니깐 서장님 모시는 자리에 오래 있게 된 거죠. 아 참내, 내가 죽어도 내 딸은 경찰한테 안 주려고 했는데 사위도 경찰이란 말이지.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영안실에 와서 제일 따따부따하고 반말 찍찍 내뱉고 이래라 저래라 유세가 심한 사람들이 형사들이기 십상이에요. 내가 그때 많이 싸웠죠. 니들은 형도 없고 경우도 없는 족속들이냐 하면서 많이 다퉜죠. 그래서 내가 죽어도 경찰놈사위는 안 보겠노라 이를 갈았는데, 허어 사람이 앞날을 장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원…

큰아들놈은 지금 안성에서 개인택시 모는데, 아 이 녀석이 피는 못 속인다고 주변에 장사만 생기면 만사를 제껴두고 간단 말이지. 돈이나 받고 그러면 내가 또 말이나 안해. 그냥 에멜무지 가서는 남들 다 몸 사리는 일을 도맡으니 원 무슨 조화속인지. 둘째 아들놈은 지금 상사로 직업군인을 하고 있는데 은근히 장의사 일에 관심을 보이대. 그래서 내가 아예 장의학과 책을 사다줬지. 이왕이면 번듯하게 자격 갖춰서 망자들 고이 모시라고, 이 애비처럼 등 떠밀려서 영안실 붙박이가 되지 말라고 이르면서요.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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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자랑은 영안실을 나와 양평공원묘지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계속되었다. 간추리면 다들 잘 살고 있다는 소리다. 잘 산다,는 기준은 저마다 편차가 있을 수 있다. 필자에게는 김영진 선생의 잘 산다는 개념이 가장 합리적인 기준으로 보인다.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가까운 사람이 딱할 때 형편껏 베풀 수 있고, 때 되면 형제자매가 부모 앞에 모여 기름 진 음식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도, 그것이야 말로 잘 살고 있는 삶의 표상이 아니겠는가. 김영진 선생의 과거는 잘사는 삶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지만, 자식 잘 사는 모습 바라보는 것만큼의 보상이 어디 있으랴. 조상이 은덕을 쌓으면 후대가 복을 받는다는 말, 빈말이 아닌 듯하다. 
 
공원묘지에 올라 김영진 선생은 한동안 말을 잃는다. 여기 저기 옮겨 다니며, 아이의 이마를 쓸어내리듯 여러 무덤 앞에 비석들을 쓰다듬는다. 그러더니 끄덕끄덕 고개를 젓다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마치 오랜 만에 여러 지인들을 만나 흥감한 듯이 환하게 웃는다. 덕분에 필자도 공동묘지에 온 거 같지 않게 편안한 기분이 든다.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선생님께서 모신 분들이 여기에도 많이 계시죠?
<font color=green>김영진 :</font> 그럼요, 여기에 잠들고 있는 사정까지 잘 알고 있는 고인들이 꽤 되죠.
<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생전에 가까이 지내시다 모시게 된 분들도 계시겠습니다.
<font color=green>김영진 :</font> 그런 분들도 더러 있어요. 얼마 전에도 그런 분이 계셨죠. 아흔 하나에 돌아가신 분인데, 예전에 내가 장리쌀도 얻어먹기 힘든 시절에 남모르게 쌀말이나 도와주셨던 분이란 말이지. 내 하두 고마움이 사무쳐서 가시는 길에 따숩게 입으시라고 좋은 옷 한 벌 마련해 드렸어요.

그런 분이 또 한분 계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훌륭한 어른이셨어요. 그 분 지론이 돈 주고 사야하는 건 빌려줘도 돈 안 주고도 마련할 수 있는 건 절대 안 빌려 준다, 인데 그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필히 돈을 줘야 장만할 수 있는 농기구나 물품 같은 건 없는 사람이 빌려 달라하면 두 말 없이 빌려줘도, 도리께나 광주리 같은 산에 가서 나무 해다 만들 수 있는 물건은 세상없어도 빌려 주지 않는다는 이거지. 즉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우는 소릴 해도 도와주지 않았던 거야. 예전에 군청 앞에 읍사무소 있던 시절에 흙벽돌 찍는 기계를 없는 사람한테 빌려주던 제도가 있었는데 내가 그 때 그 양반네 리어카 빌려설라무네 그 기계 싣고와서는 집을 지었어. 그 집에 참 오래 잘 살았어.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다 남들 도움으로 이어져 온 거에요. </b>

어느 누구의 인생인들 남의 도움 없이 이어져 온 삶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 사실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사무실에서 몇 분 거리이지만 공원묘지에 올라 있으니 세속의 잡다한 일들이 거품처럼 사라진다. 대신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혹은 내밀히 가라앉아 있었던 의문이 둥실 떠오른다. 나는 무엇일까. 내 삶은 이래도 좋은 것일까. 생판 남의 무덤 앞에 서서 뜬금없는 생각에 잠긴다. 사색하기에는 무덤 앞처럼 맞춤한 장소가 없는 듯싶다. 김영진 선생은 다시 무덤 사이를 오가며 비석을 쓰다듬는다. 사념이 길면 먹고 사는 일이 피곤해지는 법, 서둘러 작별인사를 건넨다.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 내려 가봐야 하겠습니다.
<font color=green>김영진 :</font> 그러셔, 난 조금 더 있다 내려갈려네. 그런데, 그거 아시나? 망자를 모실 때는 말이지, 일곱매를 세쪽으로 쪼개서 도합 스물 하고도 한 매를 갈지자로 매듭을 져드리는 법이다 이거지요. 그리고 고깔을 열둘 접어서는 10원짜리 동전 한 닢씩 열두 닢을 놓아 드려요. 저승 문은 열 두 대문이라 문을 지날 때마다 한 닢씩 바쳐야 지날 수 있는 거예요. 그 열두 닢이 예전에는 그냥 저승 가는 노잣돈이겠거니 여겼는데 말이지, 요즘 들어서는 그 열두 닢에 또 다른 뜻이 있겠구나 싶어요. 살아 있는 동안 아무리 적어도 열두 번은 좋은 일을 해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거지. 여기만 오면 담배 생각이 나는데, 내가 말이지 장미 담배만 피웠는데 그 담배 절판되고 나서는 담배를 딱 끊어버렸어. 자 그럼 잘 가셔요. 다음에 또 보시고…</b>

터덜터덜 내려오면서 좋은 일 한 걸 손꼽아 보니 꽤 많았다. 저승문은 거뜬히 지나가겠네 했는데 웬걸,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좋은 일 한 걸 되짚어보니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웠다. 열 두 대문은커녕 첫 번째 관문에서 땡처리되기 딱 좋다. 에라이, 저승에 열 두 대문이 어디 있고 10원짜리 동전으로 통과할 수 있는 문이라면 무서울 것도 없노라 작정에 작정을 거듭하면서 밤새 잠을 설쳤다. 그리고 며칠 째 불면증 비슷한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열 두 대문 잘 지나갈 동전 열두 닢을 부지런히 챙겨둬야 할 일이다. 이번 인터뷰 기사를 읽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독자가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YPN뉴스 (ypnnews@naver.com)

댓글목록

안사랑님의 댓글

안사랑 작성일

경험치 못한 일을 간접으로 경험합니다...
인터뷰 수고많으셨고 색다름에 잘보고 갑니다. ^]^

엉클조님의 댓글

엉클조 작성일

저 어르신 길병원에서 많이

박수운님의 댓글

박수운 작성일

양평지방신문 기사에 실리기에는 아까운 기사네요
저 어려서 5,60년대 굶던 생각이 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분 말씀이 나에게 지침이 되는구요
정말 좋은 글 다큐멘터리 글
안병욱님 감사합니다

소나무님의 댓글

소나무 작성일

한편의 드라마속 주인공이신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극복하시고 다복하게 자녀들 훌륭히 키우셨으니 이젠,
 그동안 힘든 삶에지치셨을 텐데 즐겁고 행복한 웃음으로 남은
여생을 보내셨으면 합니다.

이종인님의 댓글

이종인 작성일

평상시 잘모르던 기사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기사는 중앙방송에 나와야 겠네요

최승태님의 댓글

최승태 작성일

참으로 정직하시고 성실한 분이십니다 앞으로도 항상 건강
하시고 좋을 일 많이 하여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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