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에서 만나는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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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북으로 철마가 달린다 고구려 기상이 남쪽 평원으로 말달리던 그곳
충북 충주에 위치한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던 당시 많은이들은 경악했었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누르고 현재의 충북 충주 지점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치열한 전쟁터에서 승리를 얻어내기 위해 고구려는 과연 어떤 루트를 통해 그곳까지 남하할 수 있었을까. 고구려가 경기도를 지나 충북까지 내려간 루트 중 짧은 흔적을 양평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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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과 고구려
고구려는 현재 무덤이나 땅 속에서 발견된 주거지 흔적을 통해 겨우 더듬더듬 찾아갈 수 있을 만큼 현재로부터 먼 과거 시대에 존재했던 광활한 제국이었다. 하지만 삼국시대 당시 삼국 중 월등한 군사력으로 차가운 북쪽 반도에서 따스한 현재의 충북 지역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만큼 고구려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그 영향력은 현재까지 우리 주변 생활에 고구려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심지어는 현재 경기도 ‘양평’이란 지명조차 고구려 시대 지명에서 유래됐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표기된 고구려 군·현 이름을 살펴보면, 현재 양평 지역을 양근현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양근이란 지명은 고구려 때 사용되다 통일신라 경덕왕대에 빈양현으로 변경된다. 그러다 다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건국되면서 이 지역은 고구려 시대 지명을 다시 사용해 양근현이 된다. 그러다 1908년 칙령 제69조 ‘부군면리동 폐합에 관한 건’에 의해 고구려시대 지명이었던 ‘양근’의 ‘양’자와 인근 지평이란 지역 ‘평’자를 따 현재의 ‘양평’이란 지명이 탄생됐다.
명칭뿐이 아니었다. 높은 산이 많지만, 평평한 한강가 모래사장이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양평은 고구려에게 군사적으로 유용한 지역이기도 했다. 고구려가 남하하던 당시 한강가에 쌓여진 금빛 모래사장은 삼엄한 백제 산성과 군사력이 집중된 황해를 따라 백제를 공격하는 전략보다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아직 현존하는 팔당댐 인근 촌로들은 팔당댐 건설 이전 강가의 모습을 “평상시 바지를 걷고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며 “모래톱이 넓게 형성돼 금빛 모래사장이 아름다웠다”고 증언했다. 역사전문가들은 강가 충적 평야지대는 농사를 짓거나 물을 사용하기 유용해 과거부터 마을을 조성하기 유리했을 것으로 추정했고 실제 강가 인근에서 고구려계열 유적들이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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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백제 공격 진출로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던 루트는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남하하기 시작한 4세기 후반, 백제의 서해 진출을 차단할 수 있는 요충지 예성강 하구 지역을 공격한 고구려는 백제 대군에 의해 패배한다. 이때 자비령로에 대한 영향력이 백제로 넘어가면서 고구려는 평양성을 2번이나 공격당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이후 고구려는 예성강 하구 진출에 노력하지만, 백제는 수곡성을 전진기지로 고구려 남하를 차단한다.
하지만 고구려 광개토왕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고구려의 대대적 공세로 392년 예성강 하구에 진출, 예성강 유역 관할권은 물론 자비령로, 서해 수로까지 장악하게 됐다. 475년 한성을 차지한 고구려는 남한강 수로 전체까지 장악해, 중부 내륙지역으로 군사활동범위를 확장하게 된다. 고구려 남하 작전에 대해 역사가들은 “백제 산성이 축조되고 막강한 군사력이 배치된 황해를 따라 남하하는 것보다 고구려는 경기도 북동부를 거치는 남하 계획을 세웠고, 이에 양평 등 경기도 북동부에 고구려의 흔적들이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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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강가에서 발견된 고구려계열 유적
고구려 시대 한강의 호칭은 ‘아리수(阿利水)’였다고 한다. 현재 양평군 양수리 상석정마을이라고 불리는 남한강 충적지 인근에서 지난 2004년 고구려계열 유물이 출토됐다. 당시 유적 발굴을 진행한 성균관대 박물관 팀은 보고서를 통해 “유적 남서쪽은 현재 중앙선 철길 둑에 막혀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며 “이 일대에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등을 포함한 삼국시대 전기 유적들이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두물머리 인근에 위치한 이 지역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겹쳐지면서 유속이 낮아져 충적지가 형성됐다. 과거부터 강가 충적지는 물을 확보하기 쉽고 수렵, 농사 등에 유리한 지역으로 거주지로 추정되는 유적들이 발견되는 지역이다.
일제시대 건축된 철로가 오래돼 새 철로를 건설하기 위해 지역 조사 중 발견된 이 유적지는 1천900여평에 이르는 지역으로 경질무문토기, 타날문 토기, 철기, 유경식 석촉, 기와편 등이 발견됐다. 당시 50~100명이 거주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유적지 출토품 중 낙랑계라 불리는 고구려계열 유적은 8각형 집자리에서 출토됐는데, 낙랑계열 모방품이 아닌 당시 수입토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전기 주거지 20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건물 5동 등이 발견된 이 지역은 기원전 1세기부터 낙랑과 교류가 있었던 집단 취락지로 추정할 수 있다.
양평 강가 유적지를 실제 찾아가보니 평소 철로공사 중인 여느 현장과 크게 다를 바 없어보였다. 지금 타고다니는 기차나 전철, 인근 거주지 땅 속 등에서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고구려 유적들이 숨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과거 속의 고구려가 아직 현재와 인연을 놓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효희기자 hhkim@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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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강웅 양평군 학예사
“강폭 짧고 수심 얕은 양평은 고구려 남하정책의 요충지”
“고구려 관련 연구를 보면 예성강, 임진강을 건너는 루트는 위험성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춘천, 양평 등 물이 얕은 지역으로 우회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강웅 양평군 학예사는 고구려가 신라나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천혜의 방어물인 강을 건너야 하는데 양평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대체적으로 강이 깊지않고 강 폭이 짧은 곳이 많아 위험성이 적은 양평지역을 택해 남하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학예사는 “따라서 양평지역 곳곳에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이 상당 부분 산재해 있을 것”이라며 “양평은 고구려가 남하하는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각 지역 학예사들은 지역 유적지나 향토문화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고구려에 관한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이 학예사는 “양평군은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한 규제의 끈을 놓지 않아 덕분에 아직까지 고대 유적지나 성터 등이 큰 손상없이 보존돼 있다”며 “아직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 많은 만큼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터와 유적지들이 다수 묻혀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학예사는 실제 양평 팔당대교 인근 한 터널 부근을 가리키며 “예전에 지역의 문화재를 조사하던 중 팔당대교 인근에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성터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학예사는 “양평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있어 중요한 전략적 전초기지였을 가능성이 큰 곳”이라며 “지역의 산재한 유적들을 중심으로 연구한다면 고구려의 남하루트를 알 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효희기자 hhkim@kgib.co.kr
<출처. 경기일보>
YPN뉴스 (ypn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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