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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절경 그대로 아늑하고 정갈한 ‘천년고찰’ -용문산 사나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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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0-04-12 17:12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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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드나들 듯 기품이 빼어난 산, 용문산에는 용문사와 함께 대표 절집으로 사나사(舍那寺,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가 있다. 용문사가 산의 남동쪽에 있다면 사나사는 남서쪽의 백운봉(白雲峰) 줄기에 위치한다. 1907년 양근(楊根)과 지평(砥平) 두 고을이 합쳐져 양평이 되기 전에는 용문사는 지평에, 사나사는 양근에 속하였다. 모두 천년고찰의 전통을 자랑하지만 두 절집이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용문사가 -입구에 설치된 여러 위락시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약간 시끌벅적하고 북적거리는 반면, 사나사는 아늑하고 고요하여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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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나사에는 원증국사와 관련된 석종비 등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석종비 옆에 자리 잡은 삼층석탑은 어디서 옮겨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사나사 주변 함씨 근거지, 관련 유적 수두룩

함왕혈·함왕성·함씨각·함왕골·함왕봉....
사나사 오르는 길은 한갓지면서도 환상 자체이다. 용천2리 마을의 끝자락에서부터 ‘자연’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맑은 물, 푸른 숲, 깨끗한 공기…… 양평군이 ‘자연과 인간이 살아 숨 쉬는 수도권 제일의 전원·생태·휴양의 고장’(군청 홈페이지)이라는 표현에 저절로 공감할 수 있을 듯하다. 봄은 완연하건만 아직 차디찬 개울물은 청량한 물소리만을 남기고 상·하사천(上下斜川)을 지나 한강으로 합류하러 떠나간다. 그렇게 계곡을 벗 삼아 걷다보면 곧바로 ‘함왕혈(咸王穴)’이라는 작은 표석이 나온다. 함왕혈 또는 함공혈(咸公穴)은 함씨의 시조가 나왔다는 바위굴을 말하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함왕혈은 개울에 있는데, 얼핏 보아 잘 다듬어진 절구통을 생각나게 한다. 그 안에서 물이 솟아나온다고 하며, 가뭄이 심한 경우가 아니면 주변까지 물에 잠겨있다. 양근 함씨 후손들이 바위 주위에 울타리를 조성하고 시조를 받드는 제사를 지낸다. 함왕혈이 있는 위치에서 바로 위쪽에 함씨들이 쌓았다는 함왕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다. 이때 함왕혈은 성의 바깥쪽에 있는 셈이 된다. 함씨들이 더 이상 번창하지 못하고 쇠퇴한 것이나 후손들이 흩어져 살게 된 것도 이처럼 시조의 어머니(함왕혈)를 내쳤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옛날 이 부근에 양근 함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씨족을 이끌 만한 지도자를 원하며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바위 구멍에서 튼튼하고 총명한 아이가 나왔다. 함씨들은 이 아이를 함왕(咸王)으로 추대한 뒤 성을 축조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갔다.

함왕성은 용문산의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양근성(楊根城)·함씨대왕성(咸氏大王城)·함공성(咸公城) 등으로도 불린다. 산 정상부 넓은 대지에서 주춧돌·기와조각 등이 출토됨으로써 건물 터로 확인되었으며, 성벽의 형태가 700미터 정도 남아있다. 함왕성 터는 경기도기념물 제12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이 밖에도 사나사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용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함왕골)을 비롯하여 함왕현(咸王峴, 함왕고개)·함왕봉(咸王峰) 등 사나사 주변에는 함씨 관련 유적과 명칭이 많이 남아있다. 더욱이 사나사 경내에는 함씨각(咸氏閣)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는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경우이다. 사나사뿐 아니라 이 지역이 예로부터 함씨들의 근거지였다는 반증이다. 실제로 통일신라 말기 양근 지역 호족세력으로 함규(咸規)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학계에서는 그가 태조를 도와 고려를 건국하고 왕씨 성을 하사받는 것으로 해석하여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왕규(王規)와 동일인물로 이해한다. 한편 태조 왕건이 지방 호족세력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결혼정책을 실시하여 모두 29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 중에 함규(왕규)의 두 딸이 태조의 15번째·16번째 부인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함씨의 막강한 영향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화엄계통 사찰, 태고 보우의 숨결 스며있어

사나사는 절집 이름에서 이미 화엄계통의 사찰임을 짐작하게 한다. 옛날 한 승려가 이곳에 사찰을 짓기 위해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노사나불(盧舍那佛)이 나타났으므로 즉각 그 불상을 만들고 절 이름을 사나사라 했다는 사찰의 창건설화가 전한다.

하지만 사나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923년에 고려 태조의 자문 역할을 하며 양평 보리사(菩提寺)에서 머물던 대경국사(大鏡國師) 여엄(麗嚴)이 창건했다는 설과, 사나사 이전에 있던 대월사(大月寺)를 대경국사가 중창했다는 설 등이 전해진다. 그 후 사나사는 1367년(공민왕 16) 보우(普愚, 1301∼1382)에 의해 140여 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보우는 이곳 양근 대원리에서 태어나 13세에 출가하였으며, 과거시험에 합격했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용문산·북한산 등지에서 도를 닦는 데 열중하였다. 1346년에 원나라에 들어가 임제종 제19대 법손이 되었고, 귀국한 후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를 지냈으며 우리나라 불교계의 중흥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호는 태고(太古)이며,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사나사에서 만나게 되는 주요 문화유산도 원증국사와 관련된 석종(石鍾,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과 석종비(石鐘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가 있으며,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호)이 있다. 이들은 법당 앞마당 한편에 오붓이 모여 있다. 원증국사석종은 보우의 부도로 단순한 석종 모양이나 조각기법 등에서 고려 말에 유행하였던 부도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막상 석종의 표면에는 아무 글자도 없기 때문에 석종만으로는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석종에서 1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원증국사석종비에 “돌로 종을 만들고 사리 10과를 넣어 사나사에 두었다”는 기록이 보이는 반면, 사나사서 사리를 봉안하고 있을 만한 조형물로는 이 석종밖에 없다. 이같은 정황 등으로 1970년에 이미 석종의 주인공이 원증국사라고 논증되었다. 석종비는 보우의 일대기를 기록한 다음, 비 건립에 동참한 사람들의 명단을 새겼는데, 금이 가고 여러 군데 조각이 떨어져나가는 등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비문의 지은이가 훗날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어 불교를 비판했던 정도전(鄭道傳)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는 사나사가 위치한 양근 지방은, 서쪽으로 태백산 북쪽에서 발원한 한강이 흐르고, 양광도(楊廣道)와 교주도(交州道)의 접경지역에 용문산이 우뚝 솟아있는 지형이라 영웅호걸이 나올 만한 기운을 가진 곳이라고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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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나사 경내에는 사찰과 달리 함씨각이 있는데 이는 이곳이 함씨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수난겪은 사나사, 전쟁때마다 불 타

고려 말에 원증국사가 대대적으로 중창했던 사나사는 이후 여러 차례 수난을 겪게 된다. 7년 동안에 걸친 왜란으로 소실된 사찰이 1608년(선조 41)에 재건되었는가 하면, 영조대에는 신도들이 토지를 시주하는 일도 있었다. 즉 조선왕조가 내세운 숭유억불정책의 영향으로 사찰의 운영이 어렵게 되자 양근군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정3품 당상관 이상의 품계를 받은 사람들이 계를 조직한 뒤 영원히 사찰에 양식을 댈 수 있도록 논을 마련하여 시주한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 당상계불량비이며, 사나사 범종각에 이르기 직전 왼편으로 나무 사이에 있다.

사나사의 시련은 조선의 쇠망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항일의병전쟁이 한창이던 1907년 10월에 일제는 사나사에 있던 의병 150여 명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사찰을 전부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찰이 의병들의 근거지로 이용된다는 게 이유였다.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1909년과 1937년에 중건된 건물이 6·25전쟁으로 다시 불타게 되었다. 용문산 일대는 6·25전쟁을 통해 손꼽히는 격전지였고, 그 와중에 사찰도 온전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웅전·산신각·함씨각 등이 건립되었고, 1982년에는 서울 삼성동에 있던 봉은사의 일주문을 옮겨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1993년에는 대웅전 자리에 대적광전을 건립하고, 기존의 대웅전은 미타전(彌陀殿)으로 이름을 바꾸어 원증국사석종비 옆으로 옮겨 세웠다. 또한 최근에는 삼성각 옆에 조사각(祖師閣)을 짓고,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보우국사 진영의 복사본을 제작하여 봉안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사나사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복원되었지만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원증국사탑이나 석종비, 삼층석탑, 당산계불량비 등 곳곳에 총탄 자국이 선명하여 보는 이에게 전쟁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마을 부인회 ‘사나사 계곡을 사랑하는 모임’

사나사 계곡은 메기·다슬기·피라미와, 개나리·진달래를 비롯한 수많은 토종 동·식물의 보고(寶庫)이며, 4km에 걸친 계곡에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천혜의 휴양지이다. 여기에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계곡이 깨끗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옥천면 용천리 부녀회원으로 구성된 ‘사나사 계곡을 사랑하는 모임’이 20여 년 전에 계곡 보호를 위해 환경운동에 나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권 주민의 식수원이며 천연관광자원인 팔당호 상류 계곡과 산하가 행락객의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로 오염되는 것을 막고자 모임을 결성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계곡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것은 물론, 행락객들에게 쓰레기투기·세차 등에 관한 계몽 등을 실시하고 있다. 아무런 지원도 없는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산하를 아끼려는 순수한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이라 할 것이다. 

/출처. 경기일보
/김명우 문학박사·경기문화재단 경기학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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