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물투쟁 역사의 산증인, 김학조 양평발전연대 수석대표
정치사회
페이지 정보
본문
![]() |
양평발전연대 김학조 수석대표 |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중첩규제속에서도 아파트 등 양평의 개발기반이 들어선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찾곤 합니다”
양평의 물규제와 관련한 투쟁의 역사에서 최선봉장의 역할을 담당했던 김학조(55) 양평발전연대(이하 양발연) 수석대표.
김 수석대표는 지난 1998년 정부의 한강법 제정과 팔당특별대책 등 강력한 규제 위기에서 양평군범군민대책위원회 양평읍 사무국장을 맡으며 물규제 투쟁의 중심축 역할을 시작으로 양평읍 신애리 종합훈련장(사격장) 범군민투쟁위원회 투쟁위원장, 군비상대책협의회(이하 비대협) 수석대표, 경기연합 수석대표 등 양평투쟁 역사의 산증인으로 손꼽힌다.
지난 2008년 2월 양평의 40여개 시민·사회단체의 연합체로 탄생한 양발연을 이끌고 있는 김 대표는 대정부 투쟁의 세월동안 과도하거나 불합리한 규제를 막아내기도 하고 아파트 등 개발에 필요한 하수물량을 확보하기도 했으나 쓸쓸한 웃음속에 회한과 고뇌도 많다.
10여년 넘게 고향 양평의 억눌림에 몸부림 쳐 왔지만, 아내에게나 자식들에겐 낙제 남편이자 낙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젠 평범한 인생의 진리처럼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전부다.
세월이 예전같지 않아 젊은 지식층중에 어느 누구도 나서길 꺼려하는 현 세태에는 양발연 수석대표직을 내놓고는 싶지만 시민단체를 이끌겠다고 나서는 후배가 없는데다 오랜동안 가장으로서의 경제생활엔 뒷전이었던 자신에 대한 인생회한도 큰 까닭이다.
김 대표는 2003년 비대협 수석대표 당시 환경부가 규제고시 개정을 통해 더욱 강력한 규제정책을 내놓을 당시 삭발투쟁이나 6번국도와 중앙선 철로 점거농성을 계획, 범법자를 자처할 때 가족들이 느꼈을 충격과 가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 그 양평을 후배들에겐 더이상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크다.
“투쟁의 역사속에서 2003년 정부의 일방적인 팔당 정책에서 군민과 지자체가 참여하는팔당수질정책협의회가 탄생된 계기와 잘못된 팔당고시 개정을 막아내고 장관의 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을 이끌어 내던 그 시절이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는다” 는 김 대표는 “후배들에게 양평을 사랑했다는 소박한 가치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후회는 없다” 는 생각이다.
/조한민기자
YPN뉴스 (ypnnews@naver.com)
- 이전글윤칠선 부의장, 23일 무소속 군수 출마 기자회견 10.02.23
- 다음글윤칠선 부의장, 한나라당 탈당 무소속 군수 출마 10.02.22
![]() |
댓글목록
녹도님의 댓글
녹도 작성일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대표님같은분이 정말 양평이 발전하는데 큰역할을하신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한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드리지못한 저희들은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건강이 않좋으신줄로 알고있는데 모쪼록 건강유의하시고 건승하십시요.
아이리스님의 댓글
아이리스 작성일정치권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정한 양평발전의 숨은 공로자!!!
늘 평가받지못하는 지역의 암울한 현실속에 당신은 진정한 양평군의
영웅이라 부르고싶다.
이제 양평발전연대의 수석대표도 마무리하려는 의지에 깊은 찬사를
보낸다.
양평인들은 그의 공로에 대해 양평 역사에 영원히 기억해야한다.
혹자들은 뒤에서 욕하고 헐뜯지만 그는 양평 투쟁사의 산증이기때문에....
그대를 사랑하는 후배님의 댓글
그대를 사랑하는 후배 작성일영욕의 세월에 한축을 담당한 그대의 진실에 감사의 글을 올립니다.
명예나 부를 축적하지도 무엇하나 바랄것도 없는 그자리에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초창기 대우 받던 시절에는 너도나도 하겟다고 날리들이더니 기세등등했던 그대들은 다 어디가고 대표님만 남았나
이권사업과 자기의 이익을 위해 몸담았던 그대들은 지금 어디서 돈을 벌고 있나요!
지금이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한 시기일것 입니다.
그대의 고독과 번민을 아는 저는 그대를 존경합니다.
그많은 혜택을 본분들 양발연에 지원좀 하세요
로비한다고 줄대지 말고 외로운 대표님 점심이라도 대접하세요
개구리 올챙이 생각 못한다고 좀 너무하네요
필요하면 알랑거리지 말고 평소에 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