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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양평 태생 몽양 여운형 선생, 그는 누구인가?

정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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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8-03-05 10:07 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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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올로기에 희생당한 몽양 선생의 애국
- 몽양 선생의 재조명은 근대사 역사의 바로세우기

항일독립운동가요, 교육자요, 언론인이요, 정치가요, 체육인인 양평 출신 몽양 여운형 선생(1886~1947)이 올해로 타계한지 61주년을 맞는다.

몽양 여운형 선생의 타계 이후 우리나라 해방정국 근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 이라는 역사적 재평가로 자리매김 하기까지는 운명을 달리한 지 무려 58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2005년초 건국훈장 중 가장 등급이 높은 대한민국장이 추서될 것으로 알려졌던 몽양 선생은 오랜세월 동안 ‘좌파인물’ 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벽에 부딪혀 평가절하돼 왔던 이념의 굴레에서 결국 자유롭지 못했고 건국훈장 2급 서훈이라는 절반의 성공에 만족해야만 했다.

●좌·우익 이데올로기 이분법 시대가 낳은 희생

우리민족의 근대사는 비극으로 점철돼 있다.
당시 이념적 생각이 다른 사람은 곧 적이 되는 위험한 이분법이 사회전반을 장악한 때문이다.
몽양 여운형은 그 이분법에 저항했으며, 그 이분법에 희생당한 인물이다.

마치 바둑판에서처럼 흑 아니면 백을 쥐어야 하는 극좌와 극우만이 존재하던 지극히 단순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흑과 백을 모두 차지하기도 했으며, 흑과 백에게 결국 소외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기 전 몽양 여운형은 여론조사에서 단연코 1위였다.
해방 직후인 1948년 미국과 구 소련의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벌어진 좌·우파간 사회적 분열은 1948년 정치적 분단으로 남·북 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분단을 낳게 된다.
당시 몽양 여운형은 좌도 실체가 있고 우도 실체가 있으니 누가 누구를 배제하고 누가 주도하는 것은 진정한 통일이 아님을 울부짖었다.

즉 좌·우 합작을 시도한 대표적 지도자였던 몽양 여운형은 1947년 5월 사회노동당을 근로인민당으로 개편, 밖으로는 영국 노동당 좌파, 안으로는 좌우 중간노선을 모색하다 같은해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이 쏜 2발의 권총사격에 절명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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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2월 몽양 사랑 3인방이 2급 서훈 후 한자리 조우(좌부터 이기형 옹, 몽양의 7촌 조카 여학구, 먕평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장 장철균, 양평군 연구관 김강윤)


●몽양 여운형의 애국 독립운동

몽양 여운형은 1886년 4월 22일(음력)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아버지 여정현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22세때인 청년 여운형은 기독교에 입교하고 양평에 광동학교(교회)를 세워 학생들을 배움으로 인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말에 끝나고 1919년 1월초에는 파리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렸다.
몽양 선생은 이 만국평화회의에 대표 김규식 선생을 파견하기 위해 신한청년단을 만들었다.
신한청년단은 3·1만세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서 몽양 여운형은 초대 외무위원으로 뽑혔고 이후 의정원(국회)의장으로도 추대되기도 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이 돼 언론을 통한 항일운동도 나섰다.
1934년 조선체육회장에 취임,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사건을 주도, 조선중앙일보사가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기에 이른다.
1944년 9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한 몽양 여운형은 조선건국동맹의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 그 위원장에 취임하고 광복을 대비하였으며 10월에는 양평 용문산속에서 농민동맹을 조직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그 위원장이 되었고, 9월에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 부주석에 추대됐다.
이어 10월에는 인민당을 결성, 당수직에 앉았고 1946년 10월 신민당과 공산당과의 공동명의로 ‘좌우합작지지’, ‘입법기관설치 반대’ 라는 3당합동 결정서를 발표했으며, 11월 사회노동당을 조직했다.
1947년 5월 사회노동당을 근로인민당으로 개편, 분열을 막기 위한 좌우합작을 본격화하며 중간노선을 모색하다 총탄에 서거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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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5월 미소공동위원회 미측 대표들과 환담하는 몽양 선생


●몽양 여운형 선생의 추모 및 기념사업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마을 몽양 여운형 선생의 생가엔 집터의 흔적만을 전하고 있는 댓돌 하나가 외롭게 남아있다.
또한 집터를 수백년 동안 내려다보며 몽양 선생의 지조를 상징하는 듯한 향나무와 기념비가 고작이다.

몽양 여운형 선생을 추모하고 기리는 기념사업회는 지난 2000년부터 추모제를 비롯, 몽양의 역사적 재조명 사업을 꾸준히 추진해 왔고 독립유공자 서훈의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2005년 3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2급 서훈으로 몽양 선생은 뒤늦은 진실과 역사적 평가로부터 복원됐다.

항일독립운동가단체협의회는 2007년 2월 제1회 민족공동체상 수상자로 몽양 선생을 선정, 추앙하기도 했다.
현재 양평군과 기념사업회는 몽양 여운형선생의 생가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신임 정권의 몽양 사상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의지에 따라 복원사업이 변경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어 사업추진 자체를 담보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기념사업회는 이렇게 외친다.
“잃어버린 몽양 여운형 선생을 고향 양평의 품에 되돌려 주고 해방정국 근대사의 역사를 바로 세워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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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3월 몽양 선생의 장례식 행렬 모습


/조한민기자

YPN뉴스 (ypnnews@naver.com)

댓글목록

양평시민님의 댓글

양평시민 작성일

양평출신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시며 교육자인 몽양의 고향 양평에서 그의 발자취를 남기는 작업은 어떨지 모르겠군요. 예를 들면 양평시내의 주요도로명을 보면 시민로, 남북로등으로 명명되어 있던데 양평의 자랑이며 어른이신 그를 기리기 위해 신설되는 보건소에서 양평역전 창대리 구 보건소까지의 도로를 몽양로로 정하여 양평을 찾는 이들에게 널리 알리는 방법이 되리라 봅니다.

신원리님의 댓글

신원리 작성일

맞습니다. 양평의 위대한 인물인신 몽양의 호를 딴 도로가 1개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수원에 박지성의 이름을 딴 지성로도 있다고 얼핏 들었는데-------
양평에 몽양로 이름도 산뜻하고 양평의 어린자녀들 교육에도 좋을것 같습니다.
몽양로 ------  몽양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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