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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제자가 전하는 몽양 여운형 선생

정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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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8-03-05 10:18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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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선생의 생존 제자인 이기영 홍(91. 원로시인)


청년 여운형의 청년시절과 독립운동을 똑똑히 기억하는 여운형 선생의 제자인 이기영 옹(91·원로시인)은 이렇게 전한다.
“몽양 여운형 선생은 이순신 이후 우리민족 최고의 성웅이었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에서 ‘빨갱이’ 로 왜곡했다” 고 단언한다.

또 “해방정국 당시 외국이 아닌 국내에서 항일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김구 선생의 업적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며 “좌·우익과 공산주의, 민족주의 등을 모두 초월한 우뚝 솟은 인물” 임을 강조했다.
청년시절 광동학교(교회)를 건립하고 훗날 상해에서 인성학교를 세울만큼 후학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던 여운형은 일찌기 서양 기독교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박애정신과 신분제도의 모순점을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다.

“1908년 23세때인 여운형은 양친의 삼년상을 치른 다음 일대 혁신적인 큰일을 단행합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갖가지 신주와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종들을 모조리 해방시켰던 거죠. 평소에도 자신을 잘 따르던 신분이 낮은 평민이 죽자 시신운구를 손수 매었고 종의 자녀들에게 돈을 나줘주곤 했어요. 당시 사회분위기에서는 양반신분으로는 말도 안되는 얘기였거든요”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청년 여운형은 집안의 노비와 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그대들을 다 해방시키겠다. 지금부터 각기 자유롭게 행동하라.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다. ‘서방님’ 이니 ‘아씨’니 하는 칭호부터 싹 없애라. 오직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이니 주종지의(主從之義)는 어제까지의 풍습이요. 오늘부터는 그런 낡은 껍데기는 벗어 던지고 제각기 알맞은 직업을 찾아가라”

“청년시절의 여운형은 청년때부터 봉건유습을 타파하는 박애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이 꽉 차 있었죠. 저는 몽양을 선천적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렵 우리나라는 일본에 2천만원의 빚을 지고 있었죠. 청년 여운형은 그 빚을 갚는 한 방도로 ‘국채보상금연동맹’을 조직했고 양평 일대를 돌아다니며 우국연설도 했습니다. 양평 장터에서 사자후를 뿜는 청년 여운형의 씩씩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당시 양평군수 모씨는 애국적 일진회회원이면서도 몽양의 연설에 감동해 따라다니며 들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몽양 여운형 선생은 요주의 대상 1호였다 한다.
“해방전 일본이 몽양선생을 포섭하기 위해 초청한 때도 목숨을 걸고 일본에서 독립운동과 강연에 나선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일본인들까지 달변가인 몽양 선생에 매료되자 당시 일본 국회에서는 ‘몽양 국회’ 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몽양 선생의 독립운동을 방치한 책임을 일본 국회차원에서 문책하는 등 국회와 일본 내각을 뒤흔든 적도 있었다” 고 이 옹은 전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내 우익에 의해 친일행각으로 매도되고 정치적인 공격대상이었다” 며 당시의 시대상황을 떠올리기도 했다.

/조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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