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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넷의 태를 묻은 양평이지만 나는 아직도 이방인”-양평문화원장 장재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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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3-07-22 08:35 댓글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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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넷의 태를 묻은 양평이지만 나는 아직도 이방인”-양평문화원장 장재찬 -

2012년 4월 27일, 양평문화원이 비로소 온전한 모습으로 개원했다. 총 40억원의 예산이 소요되었는데, 장재찬 원장의 기탁금 10억원을 기반 삼았다. 양평군과 지역사회가 신축의 필요성만 재론하면서 세월을 갉아먹던 양평의 숙원 사업 하나가 한 개인의 결단에 의해서야 해결된 것이다.

10억원의 희사를 두고 우리 보통사람의 반응은 어떨까. 재물을 가치 있게 쓰는 존경스러운 사람, 이 우세할까 아니면 그 사람 참 돈도 많은갑다, 가 우세할까. 필자의 성품이 삐뚤어진 탓일 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필요 이상 오지랖 넓은 사람, 으로 바라보는 눈이 더 우세할 듯하다.

장재찬 양평문화원장은 오지랖이 무척 넓은 사람이다. 양평재향군인회 건물을 저 혼자 돈으로 세워 기탁했으며, 현 KT 사옥부지를 무상으로 조성해서 나라에 바쳤으며, 양평교회를 짓는 데 사재를 털었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장학금을 내놓고, 양평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마주칠 때마다 말 그대로 물심양면 팔 걷고 나서왔다.

그럼에도 장재찬원장에게 지역사회가 덧씌운 관사(冠詞)는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이 가장 대표적이다. 폭우가 쏟아지다 거짓말처럼 개였다가 다시 장대비가 쏟아지던 2013년 7월 17일 오전 10시에 양평문화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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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오늘 인터뷰를 앞두고 엊저녁에야 원장님의 자서전 ‘버들골에 살고지고’를 읽었습니다. 면담할 정도의 정보만 얻을 요량이었는데, 어느 한 부분 대충 흘려 읽어도 좋을 곳이 없어서 꼬박 밤을 새다시피 했습니다. 떠나오신 지 반세기가 훌쩍 넘은 북녘 고향에 대한 향수가 깊이 새겨져 있던데, 혹시 이산가족 상봉을 시도해보신 적은 없으신지요?</b>

<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안했죠. 안 한 거이, 그만한 사연이 있어요. 평통회장으로 있으면서 양평에 살던 이산가족 120분 가량 접수를 받았지만 정작 나는 할 수가 없었지.  그거이, 사연이 아주 긴데, 우리 집안이 지주출신이다 보니까 북녘에서는 역적이랑 다름없지 않아요? 우리 생가가 99칸에 문 셋을 지나야 안채가 나오는 집이었어요. 바로 위에 형이랑 여러 친인척이 내려오질 못했는데, 혹여라도 거기서 신분을 감추고 살고 있는데 내가 불쑥 나타나서 출신성분이 불거지면 어쩌겠어요.

무조건 만나는 거만이 능사는 아니다, 내 생각은 그랬어요. 그쪽 땅의 생리는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따다부따 할 거이 아네요. 내 고향땅이 38선에 걸쳐 있던 개성보다 아랫녘이라, 동란 전에는 경기도 연안이었다가 휴전 후에는 황해도 연안이 되고 만 곳이지. 사변 터지고 인민군이 맨 처음 쳐들어 온 곳이 바로 연안이에요. 천지가 개벽한다더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엊저녁 만해도 살갑기 짝이 없었던 머슴이며 침모며 하던 사람들이 모조리 돌변해서는 우리 식구를 전부 행랑채 골방에도 밀어 넣고는 저거들이 그 넓은 집을 독차지하고는 집안에 온갖 재물을 흥청망청 난도질하더만요. 게도 모자라 선친을 악덕지주로 몰아붙이고 말이지, 아 제 아버님이라 그러는 게 아니라 그이만큼 검소하고 정리가 바로 선 양반도 인근엔 없다고 칭송이 자자한 분이었던 양반을 말이지.</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아직도 생사를 알 수 없는 혈육이 여럿 계시죠?</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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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참, 그야말로 생사를 오르내리며 우리 식구들이 월남을 했지. 아버님은 그토록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내 집을 떠나지 않으셨다가 당시 제 학교 선생님이자 8240여단 타이거부대, 그게 미군이었는데 게서 근무했던 박상준이라는 분이 설득하다하다 안되니까는 수면제를 멕여설랑은 새벽을 틈타 남한땅으로 모시고 내려오셨지. 그 혼란통에, 우리가 8남매인데, 5번째인 내 바로 윗형님은 챙기지를 못했던 거이 우리 식구 모두의 평생의 한으로 남게 된 거이죠. 

그분 말고도 허고많은 가까운 인척들 생사조차 알 길이 없어요. 선친께서는 두고 온 고향, 거기 소식을 몰라 그렇게 속을 태우시다가 일흔 둘에 떠나셨지. 첨에는 망우리에 모셨는데 지금은 양평선산에 계셔요. 50년 넘게 산 이곳에 선산까지 있으니 참으로 양평은 내게 제2의 고향 아니겠어요?</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가장 기억에 남는 고향 혹은 선친에 대한 기억을 꼽아주실 수 있는지요?</b>

<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연안에서는 우리 집안 땅 안 밟으면 다닐 수가 없다고들 했어요. 그거이 물려받은 재산이 아니라 다 제 아버님의 피땀이었단 말이지. 수천 석 하는 부농인데도, 가을걷이 끝나면 식구며 일꾼들 먹을 거 빼고는 죄다 땅을 샀어요. 굶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았지만, 사는 형편은 소농과 다를 바가 없었지. 나는 크면서 새옷 입어본 기억이 없어요. 맨날 형들 입던 거 쓰던 거 물려받았지. 작은 형 입던 게 작으면 큰형 입던 거, 큰형 입던 게 크면 작은 형 입던 거로 바꿔 입으며 자랐어요. 아버님은 워낙 엄격하셔서 기실 이렇다 할 어릴 적 소회는 남아 있지를 않아요. 8남매의 막내지만 귀염 있게 자라보지를 못한 거이지. 맏형은 대단했지. 명치대를 다녔는데, 방학이면 일본에서 귀향해서서는 온 동네를 말을 타고 누볐지. </b> 

장원장의 고향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은 통일전망대에서 뻔히 건너다보이는 곳이다. 원래는 황해도에 속했다가 광복 이후 경기도로 편입되었다가 한국전 이후 다시 황해도에 귀속된다. 정전테이블에서 쭉 그어진 38선이 연백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그곳 사람들의 운명도 함께.

중학교 4학년(현재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소년 장재찬은 전시를 혹독하게 치른다. 악덕지주의 아들로 핍박 받으며, 러시아군의 압제와 횡포를 목격하며, 밤에는 인민군치하 낮에는 국군치하의 세상을 견뎌낸다. 어디로 떠나는 배인지도 모를 선박에 올라 단신으로 월남을 기도한다. 침몰 직전에 덕적도에 닿아 목숨을 건지고 맥아더의 인천상륙 덕분에 남한 땅에 오른다.

우역곡절 끝에 가족을 만나, 끊겼던 학업을 잇는다. 경희대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한의사면허를 취득한다. 양의학을 더 공부할 요량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포기하고 만다. 못 다 이룬 학업은 한이 되어, 훗날 연세대의과를 졸업하고 나이 예순에 일본도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숨은 힘이 된다. 누님을 따라 양평에 터를 잡고 62년에 이르러, 이화여대 출신의 손길수를 아내로 맞는다. 양평에 부부의사가 탄생한 것이다.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현대식 의료기관으론 양평 최초 격인 양평의원을 부인과 함께 개원하셨습니다. 60년대 초반이었으니 양평의 생활수준이 그랬듯이 의료환경도 대단히 척박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에 상황을 간추려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b>

<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왜정시대에 여기 양평에 박기형선생이라고 말 타고 왕진다니시던 의사가 제 매부의 선친이셨어요. 매부 박재홍씨도 양평에서 의사로 계셨는데, 사돈집안이나 저희집안이나 의료인이 많아서 전부 따지면 스물 세분이 되셨어요. 내 둘째 누이와 매부가 서울대학병원에서 근무하다가 결혼을 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서는 오게 됐죠. 51년 수복 당시 학도병으로 매부를 찾은 게 첫걸음이었어요.

그 무렵 ‘자유부인’이라는 영화가 공전의 대히트를 했는데, 어쩌다 나도 영화판에 껴들게 되었어요. ‘나비야, 청산 가자, 라는 영화제작에 모든 걸 걸고 뛰어들었다가 크게 낭패를 보고는 휴양차 내려와서 우물우물 하다 그냥저냥 눌러앉게 된 거죠.

당시 병원이 두 군데 있었는데, 원장님 한분은 정치판에 또 한 양반은 아편에 취해서는 환자들이 오갈 데가 없는 형편이었어요. 지천에 아편중독자에 결핵환자가 널려 있었는데 말이죠. 거기에다 읍내 한복판 약국에서는 아예 큰방 한 칸을 ‘하우뽕’이라는 아편이랑 별반 다를 게 없는 약을 주사 놓아주고 사람들이 널부러지는 용도로 쓰고 있을 지경으로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 양평의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진료를 시작했죠. 그전에도 매부의 약국이나 병원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이렇다 할 사명심은 없었다는 게 옳아요. 초창기엔 고생이 자심했어요. 전기가 있나, 물이 있나. 양평읍사무소 앞에 유일하게 우물이 있었는데 게서 물 길어다가 쓰면서 온갖 환자를 돌봤죠. 적당히 하다가 서울로 도로 가볼란다 그런 속셈이었는데, 그때는 양평역에서 기차표도 몇 장 안 되게 제한해서 팔던 시절이라 저절로 서울과는 뜸해지고 양평과는 정이 붙고 그리 되더군요.  </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아편이 그토록 성행을 했었나요?</b>

<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과거에는 양평이 양귀비재배로 유명했어요. 산기슭마다 양귀비밭이었고, 집집마다 몇 포기쯤은 다들 키웠죠. 약 구하기가 힘드니까. 탈만 나면 그걸로 때우곤 했어요. 주사기가 귀했던 시절이니까 아편주사 돌아가며 맞았으니 온갖 전염병도 기승을 떨쳤죠. 내가 처음 병원 시작할 당시에는 그러한 사유로 단명하는 이들이 흔해 빠졌어요. 50년은 넘고 60년은 안 된 시절에 양평의 현실이 그랬어요, 암.</b>

장원장의 회고록 ‘버들골에 살고 지고’에는 양평의 60년대가 고스란히, 뼈아프게 살아 있다. 특히 가슴이 아팠던 대목은 숱한 부녀자들이 자살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념에 이끌려 좌익이 되고 북으로 떠나버린 많은 양평의 남정네는 또 그만큼의 과부 아닌 과부를 남겼다. 남겨진 여인 가운데 여럿은 떳떳하지 않은 연분을 맺게 되고, 원치 않은 아이를 잉태하게 되고, 절망 속에서 길을 찾다 스스로 죽음을 향하게 된다.

만연한 아편중독도 양평근대사의 깊고 깊은 상처다. 범죄를 저지르고, 가산을 탕진하고, 비명횡사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젊은 부부의사 한 쌍이 막아내기에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불과 반세기 전 양평에서 펼쳐졌던 일상의 풍경이다. 그 참혹한 세월 속에서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길러냈음에 책을 펴 놓고도 한참 동안 눈을 감게 만들었다.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원장님이 행하신 크고 작은 선행들이 지근거리 사람들 말고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보통사람으로선 엄두조차 안 나는 일들을 한두 번도 아니고 그렇게 해내신 데에는 또 그만한 신념이랄까 원장님만의 철학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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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글쎄, 난 조금 뭐한다고 한 거는 여기 몸담고 거진 평생을 살았는데 그래도 어쨌든 간에 진 빚은 좀 갚고 가야 하지 않으냐 해서 좀 하긴 했죠. 내 집이 있다 내 땅이 있다, 뭐가 있다있다 해봐야 재산이라는 게 다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둔 게 아니겠어요? 나야 뭐 당연히 잠시 위탁받은 청지기일 뿐이고.

어렸을 때, 자치기나 땅따먹기 해봤어요? 한뼘 두뼘 더 차지하려고 동무들과 악다구니를 써가며 극성을 떨다가도 해가 지면, 아무개야 밥 먹어라 엄마가 부르면 죄다 팽가치고 집으로 달려가야 하지 않습디까? 뭐이 또 그닥 아까울 것도 없이 말이죠. 인생이 다 그런 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희 할머니가 우리나라 기독교 들어올 무렵부터 신앙인이었어요. 그러니 온 집안 식구가 모태신앙인 거지. 나는 여태 1년 후 10년 후를 계획하며 살아온 바가 없어요. 원대한 계획보다 더 귀한 것은 당장의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 라고 생각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 살았으니 오늘이 참 고맙다, 다음 날 일어나면서는 오늘 또 하루를 주셨으니 참 고맙다, 열심히 살자, 내 마음을 속이지 말고 하루를 살자, 그렇게 마음먹으면서 살아왔어요.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서 인생이 되는 거 아니겠어요? 하루하루를 잘 살면 그거이 잘 산 인생인 것이지.</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가장 보람되었던 일과 가장 실망스러웠던 일을 묻고 싶습니다. </b>

<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현대아파트’죠. 그거이 가장 보람되면서도 가장 수난을 치렀던 내 일생일대의 사건이지 싶어요. 어느 날, 현대건설 고위간부 명함을 들고 누가 나를 찾아왔습디다. 여기 양평에도 좋은 아파트단지 하나는 세울 때가 되지 않았느냐, 선생님이 쾌히 나서셔야 이 역사를 이룰 수 있다, 이러면서 접근을 해서 시작되었어요. 그 과정은 하도 다사다난해서 다 접어두고, 결과적으로는 내가 엄청난 돈을 다 물어내게 판이 돌아간 거죠. 나는 정말 하나도 잘못한 게 없고, 일원 한장 부정한 돈을 취한 바가 없는데도 그거이 그렇게 돼버린 거예요. 사업가의 탈을 쓴 사기꾼들에게 당한 거죠. 95년도 그때 돈으로 25억원이었어요.

나도 인간인지라 고민 참 많이 했어요. 이 돈이면 내가 평생을 편히 살 텐데, 아예 이참에 여기 양평을 떠버릴까, 입주자들의 형편이야 어쨌든 법으로 끝까지 싸워서 이 난국을 이겨내 볼까, 꿈속에서도 끌탕을 하다가 결국은 내가 다 짊어졌지요. 평생을 벌어서 집 한 칸 마련하려는 사람들을 짓밟고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릴 거이며, 장재찬이가 도망자로 평생의 낙인이 찍히는 짓은 도저히 할 수가 없더란 말이죠.

그 25억원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어요. 사기꾼 중에 하나의 명의로 당시 장호원 읍사무소 앞 아파트 8채가 돼 있더란 말이죠. 저도 그 큰돈을 만들어내야 했으니 형편이 어쩠겠어요? 그래서 압류를 걸었죠. 처음에는 눈 딱 감고, 양평이야 내 동네니까 남의 사정 다 봐줬지만 이천이야 완전히 타향이니까 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돈만이라도 살리겠다 작심을 했었지.

근데 그거이 또 그렇대. 이천시장이며 의장이며 서신도 보내지, 찾아오지, 제발 억울한 사람들을 좀 살펴봐주시오, 그런 부탁을 끝도 없이 하는데, 그래도 내가 눈을 딱 감고 버텼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여교사 한분이 어린애 하나를 대동하고 찾아와서는 펑펑 울기만 하대요. 거기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래, 내가 그 돈 살려서 그 돈 쓸 때마다 이 마음 아픈 사람들이 떠오를 텐데 그거를 어찌 견디고 살겠느냐, 다 부질 없는 욕심이다, 청지기 주제에 이게 다 무슨 헛된 욕심이냐, 그러고 압류를 풀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참 묘합디다. 압류 풀면서, 거기에 소요되는 경비만큼은 8집 입주자들이 갹출을 해서 감당을 하는 게 유일한 조건이었는데, 막상 압류 풀어주고 제각각 제 명의로 들어앉더니 언제 그랬냐스리 없던 일이 되고 말았어요. 허허, 누구 탓을 하겠어요? 사람이라는 게 그런 건데.

내 예전에는 돈도 많이 꿔줘 봤고 보증도 수없이 서줬어요. 그때 만해도 예금자정보보호 용어자체가 생경할 때라, 알려고만 들면 누구 통장에 얼마나 들어있는지 다 알 수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내 통장에 얼마가 들었는지 다 알고서는 딱 1주일만 돌려쓰겠노라 통사정을 하는 지인들을 어찌 모른 척할 수가 있었겠어요? 근데 그것도 다 그때뿐, 약속 지키는 사람은 드물어서 숱하게 대신 갚고 돈 떼이고 그랬어요. 압류 풀어주면서 생긴 사단 이후로는 절대 돈거래 안합니다. 정말 못할 짓이에요. 돈 버리고 사람 잃어버리는 그런 거 말이죠.</b>

장원장은 바지런한 사람이다. 양평에서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일본을 오가며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냈다. 뿐이랴. 연세대학교보건대학원동창회장을 위시한 여러 사교단체의 대표로, 평통과 이북도민회와 양평경찰서자문위 회장을 위시한 여러 지역단체의 대표를 역임하거나 재임 중이다. 이름만 걸어놔도 숨이 가쁠 터인데, 의미 있는 행사장이나 뜻 깊은 장소에서 마주치는 일이 예나 지금이나 차등이 없다. 몇년 전, 허리디스크로 잠시 거동이 불편했던 적을 빼면 나이 여든이 믿기지 않는 행보다.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제2대 군의원으로 또 수많은 지역사회단체의 수장으로 활동해오셨습니다.  감투욕심 많은 분으로 헐뜯는 분도 없지 않습니다만.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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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보고도 못 본 척,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는 그게 안 됩디다. 그래, 이런 저런 동네일에 하나 둘 자의반 타의반 간섭을 하다보니까 군의회에 들어가서는 무언가 뿌리부터 좀 바꿔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듭디다. 면전에서는 티를 안 내나다가도 뒷전에서는 ‘굴러온 돌’로 따돌림 시키는 주변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도 없지 않아서, 좋다, 나를 한번 저울에 올려놓고 신임을 물어보자 하는 오기도 있었구요.

상대후보 두 분이 다 토박이였는데, 내가 크게 인심을 잃지 않았는지 덜컥 당선이 되어서는 의회에 들어갔는데, 그게 또 행정을 해보지 않은 경륜으론 제 할 바를 다 못하는 자리더군요. 4년 소득 없이 열성을 부리다가 또 출마하라는 부축임을 고사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죠. 그러고는 더 많은 단체에서 이 자리를 맡아 달라 저 자리도 맡아 달라 청이 끊이질 않아서, 감투 많이 쓰긴 했죠. 보람도 없지 않아요. 신협이 사면초가였을 때, 제가 예금고 42억원 시절에 이사장으로 취임해서 150억원으로 만들어놓고 퇴임했어요. 

가장 고생스러웠던 건 수동전화에서 자동전화로 바꾸는 데에 일조했을 때에요. 정부에서 10억원을 지원금으로 책정해놓았는데, 40년 전이었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죠. 그런데, 양평군이 전신전화국 세울 장소를 내놓을 형편이 안돼서는 이게 파주인가 어딘가 딴 동네에 빼앗길 사단이 난 거지. 민관식씨라고 당시 여기 면장이셨는데, 그분이 민병채군수의 부친이시자 내게는 친형제 같으셨어요. 그 양반이 매일 같이 찾아와서는, 장원장, 이 일을 어쩌면 좋소, 용단을 내려주시게, 나를 붙들더란 말이죠.

지금이야 수동식전화니 자동식전화니 차이조차 다 잊혀버린 시대이지만, 그때 만해도 후진과 선진이 갈리는 일대거사였어요. 그래, 내가 크게 결심을 했죠. 이만큼 자리 잡고 사는 것도 다 양평 덕분이고 다 양평에 진 빚인데, 이번 기회에 좀 갚아보자, 그렇게 마음먹고는 산 하나를 사고 내 밭 2천평을 더해 부지조성에 나섰죠. 그때 토목기술로 산 하나를 들어내는 일이니 오죽 험난했겠어요? 매일같이 빈 쌀가마니 300포를 온종일 물에 적셨다가 바위를 덮고서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댔었지.

방비를 한답시고 했지만 돌덩이가 산지사방으로 날아다니고 주변에 민원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지. 민가며 건물이라곤 철길 따라 몇몇 집 말고는 죄다 농경지였는데도, 장재찬이 때려잡자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야밤에 도끼 들고 집으로 쳐들어오는 사람도 심심찮아서 내 집 담을 넘어 파출서로 도망가서는 몇 시간씩 졸다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지. 그래도 그때 일 벌리기 잘했잖아요? 안 그랬으면 거기가 지금처럼 하나의 시가지로 발전해 있겠어요, 어디?</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최근에 지인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 양평에서 50년 넘게 살아오신, 부부의사로 헌신적으로 의술을 펼쳐 오신 원장님께서 자주 “나는 양평에서 늘 이방인이다.” 자조 섞인 토로를 하신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고 이곳 양평 토박이의 한 사람으로써 너무나 죄스러웠습니다. 정말 늘 이방인 같은 기분이신지 매우 궁금합니다. </b>

<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내가 한번은 교육장님한테 양평초등학교 6학년 청강생이라도 시켜달라고 농담반 진담반 부탁을 한 적이 있어요. 나도 양평국민학교 출신이라 내세우며 양평사람으로 한번 살아보고 싶어서요. 솔직히, 몇 대만 거슬러 올라 따지면 양평 토박이가 몇이나 되겠어요? 대한민국 어디나 그렇듯이 타관사람이 더 많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부려먹을 때는 한동네사람으로, 정작 중요할 때에는 타지사람으로 치부하니 원...

토박이라 내세우는 데에도 자격이 따라붙는 거예요. 누구보다 자기 고향을 아끼고 또 위하는 건 기본이요, 자기 고향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정도는 돼야죠. 재산이며 지위며 다 고향땅 고향사람 덕분인데도 죄다 저 혼자 잘나서 된 줄 알고는 거들먹거리는 게 토박이 행세는 아니란 말이죠.

양평에 선산 마련해서 부모님 모시고, 내 아이 넷의 태를 묻어도 나는 아직도 양평사람이 아니에요. 자격지심이 아니라 자주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따돌림과 차별을 당하곤 합니다. 이러한 텃세와 배타성으로 어찌 서울수도권의 일원으로 지역이 발전할 수 있겠어요? 굴러온 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박힌 돌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지역사회풍토는 필히 사라져야 해요.</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저만 아니라 원장님을 가까이 해본 사람들은 원장님이야 말로 훌륭한 양평인이며, 진정한 애향인이며,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퇴색하지 않을 양평의 귀감이라고 확신하고 있을 겁니다. 양평의 후배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b>

<b><font color=green>장재찬 :</font> 그렇게 봐주니 참 고맙지만, 나 역시 지나온 세월을 더듬어보면 부끄러운 일투성이에요. 새마을금고 이사장과 문화원장을 역임했던 김유식씨의 형, 김유관씨랑 몇몇이서 한때는 매일 같이 술독에 빠져 살았어요. 술에 취하는 게 곧장 천국이다 그런 심정으로 호기를 부렸지, 백운관이다 양회관이다 서회관이다 뺑뺑이를 돌면서 여자들과 기름진 안주로 밤을 지새우며 그날 벌어서 그날 홀랑 갖다 바치는 짓을 몇몇년을 해댔어요.

보다 못한 어머님이 내려오시고서 그 버릇을 고쳤는데, 맑은 정신을 되찾아서야 내가 해야 할일이 눈에 들어옵디다. 양평교회에 큰 죄를 지은 게 하나 있는데, 양평아파트 사단 때문에 버젓한 교회 하나 내 힘으로 지어서 받치겠노라는 약속을 어기고 말았지. 건축면적 1,500평을 1,200평으로 줄이고 교회 돈 반 내 돈 반으로 마무리한 게 아직도 마음에 걸려요. 나중에야 필리핀에 교회 신축하는 것으로 내 불찰을 덜어내긴 했지만요.

당부라면 당부고 부탁이라면 부탁이랄 게 있긴 있어요. 내 재산이라 하더라도 나 혼자 만의 것은 아니라는 걸 가진 사람들이 깨우쳤으면 해요. 다 그게 주변의 도움으로 이뤄진 거 아니겠어요? 내 식구만 챙기지 말고 고향의 모두를 위해서도 사용했으면 좋겠어요. 어찌 나라에서 전부 해 줄 수가 있겠어요? 이 시대 우리 고장에 꼭 필요한 일들은 이 시대 우리 고장에 사는 사람들이 나서야 하는 거죠. 어차피 세상 떠날 땐 다 내버려두고 가야 할 재산, 좋은 일에 쓰는 게 내가 살았던 세상에 나를 영원히 남겨두는 지혜가 아니겠어요? 내가 살아온 흔적을 남겨두는 걸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기는 마음씨가 먼저이겠지만.</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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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장은 양평에서 소천해서 양평선산에 묻힌 어머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생전의 어머니는 소년 장재찬에게 늘 “막내야, 너는 앞줄에 서는 사람이 되지 말고 뒷줄에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간곡히 타이르곤 했다. 장원장은 회고록에서 어머님의 가르침을 어긴 변명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감당했던 그 자리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다 사람들에게 떠밀리거나 남들이 대게 외면하는 자리들로 말하자면 속빈 강정이라 할까, 여하튼 실속은 없는데 해야 할일은 많은, 어찌 보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감투를 쓰고 살았다.

남들이 기피하고 떠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거기에는 언제나 괴로움, 슬픔, 외로움 등 보살펴야 하는 고통들만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인간으로서 보상받아야 할 것들을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그럴 듯한 변명이지 않은가. 고통 받는 이웃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으로 못 박는 인성이야 말로 모친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참된 기독교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어머님의 가르침을 어겨 어머님의 소망을 이뤘으니, 참으로 떳떳한 변명이지 아니한가.

양평사람 장재찬님께 이 글을 읽은 양평군민과 더불어 한없는 존경을 바친다. 




YPN뉴스 (ypnnews@naver.com)

댓글목록

존경님의 댓글

존경 작성일

양평에도 이런분이 계셌네요.
지나가던말로 들어본적이 있지만 장재찬원장님이 이런분인지 자세히 몰랐네요.
장재찬원장님처럼 지역사회에서 모범적인 분들 이야기를 많이 실어주시기 바램합니다.

지역민님의 댓글

지역민 작성일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장재찬 님의 노고를 알게됐습니다
이런 분이 계셔서 우리 지역이 그나마 이만큼 살수 있었다니...
우리 젊은 사람들이 미쳐 모르고 있던 부분이 컸네요..
지역민들도 못하는 큰일을 하셨음에도 아직도 이방인 취급을 당하신다니...
다 이지역 어른들의 문제겠지요.
감투 자랑들만 고만 하시고
좀 본 받으시죠?
특히 군의원이라는 님들아~

지역주민님의 댓글

지역주민 작성일

장재찬 장로님을 생각하는분들이 많이있지요.저도조금오해을한것 같습니다.장재찬장로님께서 엄청난재산을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알았지 어떻분인지는 몰라지요. 저는불교신자지많 모법된기독교인들도 많이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양평군에서는 존경하는부들이 많이 있는것으로 알고 있지요. 참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인같습니다.

양평장님의 댓글

양평장 작성일

토착인들의 이기심이랄까 ?
대인이라 쉽사리 받아드려지지 않나봅니다
양평인으로서 보기드문 훌륭한 분이십니다  존경합니다

훌륭하신분...님의 댓글

훌륭하신분... 작성일

그저 여유가 있으셔서
좋은일 하시나보다 했었는데
정말 훌륭하신분이시네요.
존경스럽읍니다.

단아님의 댓글

단아 작성일

양평인 누구도 해내지못한 일들을  해내셨는데 ..아직도 이방인은 공감하는 단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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