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PN인터뷰>양평기업의 현주소는 그저 마음이 짠할 뿐입니다. -신 왕 수 양평기업인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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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PN인터뷰-||양평기업의 현주소는 그저 마음이 짠할 뿐입니다. -신 왕 수 양평기업인협의회 회장-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폭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했다. 현재까지 약 1조원을 더 벌어들었으며, 올 연말까지 가면 3조원 넘게 격차가 벌어질 거라는 예상이다. 더 벌어들인 만큼 국민 개개인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는지는 불문에 붙이자. 무엇이든 일본을 이기는 건 대단히 유쾌한 일이니까.
그러나, 이렇듯 전대미문의 국가적 경사 속에서 양평의 기여도와 수확량은 얼마나 될까에 생각이 미치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만다. 규제법령에 몽땅 책임을 전가하는 건 익숙하고 비겁한 핑계일 뿐이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한 결과 아니겠는가.
유독 양평에서만 향토기업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선뜻, 양평을 대표할 만한 기업이름을 내놓을 수가 없다. 엄연히 이곳 양평에도 기업인협의회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2013년 시월 마지막 날, 신왕수 양평기업인협의회장을 만났다. 거두절미하고 양평기업의 현실을 물었다.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양평에서 기업하시기가 어떠십니까?</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이 많습니다. 가장 큰 고초는 양평의 제반사항 자체가 反기업적이라는 점이죠. 물론 규제일변도인 국가정책에 가장 큰 책임이 있겠습니다마는, 지역정서나 행정관서의 마인드도 그다지 기업활동에 호의적이지 않아요. 그저 개인이 돈 벌려고 하는 일, 운영자 개인의 이익도모가 목푠데 뭐 때문에 도와주느냐 하는 정서가 지배적인 듯해요.
바깥에서도 양평은 아예 기업이나 공장은 설립할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교통편이나 땅값이나 수도권에서 양평군 정도의 조건이면 상위권인데 투자자본이 들어 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죠. 공장이라고 다 자연환경을 훼손하거나 관련법규를 위반하는 건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생적인 기업 설립도 매우 저조한 형편이구요.
지금 양평군경제인협의회 소속사가 46개사에 불과합니다. 이천은 말할 것도 없고 비슷한 여건의 여주와 비교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죠. </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양평기업인협의회회장의 입장에서 양평기업의 현주소를 짚어보신다면?</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짠해집니다. 그냥 슬퍼져요. 한 마디로 우군이 하나도 없는 적진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게 양평기업 대부분의 현주소입니다. 물론 각 기업 저마다의 경쟁력이나 전문성이 최우선이겠으나, 잠재력 높은 기업들조차 지역사회에서부터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양평보다는 서울에 있는 기업이 뭐가 나도 낫겠지 여기는 지역정서, 정당한 가격책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격이면 서울업체에다 맡기겠다는 그런 이상한 지역정서, 이런 게 아직도 만연해 있어 보입니다.
제가 99년도 농특산물 경진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제 딴에는 꽤나 자랑스럽고 대견해서, 이런 사안 정도는 군청이나 지역요로에 알려야 하겠다싶어서 연락을 취했는데, 반응이 ‘그래 너 잘 났다. 근데 어쩌라는 말이냐’ 딱 이 정도였어요. 다른 지역기업들은 장관상 정도에도 해당시군 단체장이나 국회의원의 화환이나 꽃다발이 줄을 이었는데, 저희 회사는 격려의 말 한 마디도 받은 게 없었어요.</b>
이상하긴 이상한 일이다. 타이틀도 애매한 대회에서 순위도 애매한 상을 타고서도 법석을 떨기 일쑤인 게 양평군의 습성인데, 어쩌자고 공인된 수상에는 그리 인색하게 굴었을까. 지역기업의 수확이 지역경제에 직결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공전의 베스트셀러를 읽어본 사람이 양평군청 안에 하나도 없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2007년도에 제 1회 경기도 농산물 수출 100만불탑을 수상하셨습니다. 창업에서 그 성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짧은 시간에 말하기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고, 가슴 벅찬 보람의 과정이었습니다. 96년도 고향땅 전수 3리에 부지 400평 공장 190평가량 규모에서 창업했는데, 사업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다 그랬겠지만 자신만만했어요. 아이템이 프로폴리스(꿀벌은 박테리아가 서식하지 않음에 착안하여, 1965년 프랑스 레미 쇼방이 발견한 천연항생제. 나무의 새싹이나 잎줄기 혹은 연한 가지의 자가 치료성분. 꿀벌은 이 프로폴리스를 모아 벌집의 구멍이나 틈을 막고 지붕을 고정시켜 외부의 오염을 막음) 였거든요.
그 무렵 일본에서 장수건강식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저는 지용성인 프로폴리스를 수용성으로 만들어서 좀 더 상품가치를 높이는 데에 주력했죠. 이것만 성공하면 내수시장은 물론이고 국제시장도 석권할 수 있다 자신했어요. 그런데, 상품개발이 구체화되던 창업 1년 만에 IMF가 터졌습니다. 탈탈 털어먹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더군요.
몇 달 좌절의 늪에 빠져 있다가 다시 힘을 냈죠. 이번에는 인삼을 택했습니다. 제가 83년도부터 인삼산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어느 분야보다 실패할 확률이 적어서였고, 건강증진식품이야말로 미래산업이라고 굳게 믿어서였죠. 한민족의 대표브랜드가 뭐겠습니까? 삼성이나 현대, K-POP 혹은 한류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봐야 불과 몇십 년 안팎 아니겠습니까? 고려인삼은 2천년 전부터 변함없이 우리나라 대표브랜드이구요.
인삼 관련업체만 해도 국내에 850개를 헤아립니다. 또 수많은 외국기업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장에서 거의 막둥이인 후발업체이지만 기존의 업체들이 놓친, 기존의 업체들이 해내지 못한 부분을 죽어라 공략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관련업계나 관청이나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되고, 그게 또 자연스럽게 우리 고려인삼연구주식회사의 신용도를 올려주고 제품의 홍보를 해주게 되고, 당연히 매출로 이어지게 된 것이지요. 제 자랑, 아니 저희 회사 자랑 같아서 쑥스럽습니다만, 2004년 제 41회 무역의날 대통령으로부터 수출탑, 2007년 농림부장관으로부터 제8회 농식품수출탑, 경기도지사로부터 제1회농산물수출탑 등 중앙정부나 학계의 중요한 상은 안 받아본 게 없을 정도입니다.</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100만불탑 수상에서 6년이 흘렀습니다. 지금 사세는 어떠신지요? 많이 신장했겠지요?</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올해 350만불을 목표했는데, 400만불은 넘을 것 같아요. 내년쯤이면 농특산물 수출 500만불탑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b>
500만불이면 60억원이다. 대단한 성과이지만 처량한 규모이다. 이렇듯 힘든 지역기업풍토에서 그만큼의 수출을 해낸 것은 경이로울 지경이지만, 그 정도 금액이 양평기업을 대표한다는 건 씁쓸할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수출규모는 수직으로 솟구쳐왔다. 1964년 1억불을 돌파했고, 1977년 100억불을 달성했다. 지금 6000억불 수준에 도달해 있다. 1억불에서 6천억불, 불과 반세기 만에 6천배로 신장했다. 양평의 수출현황도 그랬으면 좋겠다. 고려인삼연구주식회사뿐 아니라 이 땅 양평의 기업들이 모두 그렇게 미친 듯이 신장했으면 좋겠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이 아이돌을 꿈꾸는 것처럼 허황한 소망이겠으나.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58년 양평에서 출생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년의 기억이 많으실 텐데, 가장 생생한 기억을 꼽으라면?</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제가 태어난 강하면 전수리는 그야말로 벽지(僻地)였습니다. 물이 가로막고 산이 가로막는, 곡식 해먹을 반반한 평지마저 드물었구요. 자동차를 1년에 한 두대만 봐도 운이 좋았을 만큼 양평의 오지 중에 오지였죠.
6촌형님이 집안을 일으켜, 서울에 새집을 지으면서 본가의 커다란 향나무를 옮겨가셨는데 그때 지에무씨(GMC)트럭을 처음 봤어요. 이포대교에서 배에다 싣고 왔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세상에 그렇게 큰 물체가 저 혼자 굴러간다는 게 눈으로 봐도 안 믿어지더라구요. 꽁무니를 쫓아서 큰길까지 뛰느라 생고생을 했던 기억, 그리고 그 구수하면서도 뭐랄까 문명의 향기 같이 달콤했던 자동차기름 냄새가 아직도 선명합니다.
국민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서울로 전학가지 전까지의 등굣길은 정말 산전수전이었어요. 산비탈을 타고 올라가서 바위타고 내려오고, 장마 때마다 떠내려가던 낙엽송 다리 때문에 노상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때 국수리에 중학교가 생기지 않았으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전부 국민학교 졸업으로 끝났을 거예요. 곡물을 뱃삯으로 내던 나룻배가 지금으로 치면 스쿨버스였죠. 그때 사공하시던 분의 아들이 교회장로로 계십니다. 가끔 뵈면, 그때의 회상을 나누곤 하죠. 곱씹어도 진력나지 않는 추억입니다. </b>
필자 역시 나룻배의 추억을 지니고 있다. 요맘때처럼 하늘이 높고 푸르를 때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룻배를 탔다. 어머니는 가을걷이 끝난 들판에서 감자며 고구마 이삭을 주어 겨울양식에 보태시곤 했다. 필자의 부친은 공직에 계셔서 그나마 중산층에 속했을 터인데, 그때는 그렇게들 살았다.
귀에 딱지가 앉은소리지만 불과 몇십년 전만해도 안 굶고 사는 게 극락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 그 시절을 견뎌낸 연령대의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는 터무니없이 너그럽다. 수출품에는 좋은 부자재를 장착하고서도 가격은 내수시장보다 헐하게 받는 국내자동차기업에도 관대하고, 노동조합을 원천봉쇄하는 데 혈안이 된 국내기업에도 관대하다. 유년시절보다 먹고살기가 훨씬 나아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가권력에 터무니없이 관대하다.
터무니없는 관대함은 국가권력이나 기업을 좀먹는 원인균임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관대함에 기생하는, 기업과 국가권력의 못된 버릇이 이토록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그 이후의 성장과정, 그리고 고향 양평에 회사를 설립한 배경도 궁금합니다.</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중3 때, 서울로 전학 와서 대학교까지 마쳤습니다. 직장생활 잘 하다가 문득 나만 해낼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무언가 결과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이 굳게 생기더군요. 직장생활에서 항상 좋은 평가를 받다보니 자만심이 없지 않은 듯도 합니다.
고향땅에 기업을 세웠으니 물려받은 거로 시작했겠지, 하는 주변의 눈이 많습니다만, 사실은 제 앞으로 된 척박한 땅 400평이 전부였습니다.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거의 맨손이다시피 시작해죠. 아까도 조금 밝혔듯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창업 1년 만에 만난 IMF를 가까스로 넘기고, 특허상품 몇 개발해서 이제는 자리를 잡아가나보다 했는데, 99년도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영등포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성산대교를 막 건너려는 데에 다급한 전화를 받은 거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다리에 힘이 저절로 풀리더군요. 뒤에 오던 차들이 클랙슨을 울리고 난리가 났는데 저 세상 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리더군요. 1주일을 탔습니다. 그렇게 고생고생 일궈오던 회사와 공장과 창고가 7일 낮밤을 타는데, 제 온몸도 같이 타들어갔죠.
개인가정사도 순탄치가 않았어요. 거의 2년마다 한번 꼴로 대형 교통사고가 나는 거예요. 아들녀석 둘, 아내와 나, 큰 수술 여러 번 받았습니다. 특히, 아내는 전신마취수술을 8번이나 받았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게 나 혼자만 잘한다고 잘사는 게 아니며, 인간사가 인간의 힘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주 늦어서야 깨달았어요. .
우리 회사 제품생산에 필요한 자재가 1000가지입니다. 그 1000가지를 공급해주는 사람들이 도와줘야 하고, 또 많은 관련기관에서 도와줘야 하고, 또 수많은 소비자와 바이어가 도와줘야 우리 회사가 굴러갑니다. 세상은 그야말로 도움의 네트워크 아닙니까?
저는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교회장로 일을 회삿일 만큼 챙깁니다. 인간의 힘만으로, 그렇게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도움을 주고받는 네트워크가 탈 없이 운영될 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저희 회사의 가장 중요한 채용조건은, 하나님은 믿지 않더라도 같이 예배를 볼 수 있는 겸손을 갖춘 자, 입니다.</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나눔 실천이라든가 지역사회활동이 매우 활발하십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지역기업인의 의무랄까 책무랄까, 여하튼 사회봉사 실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시는지?</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지금은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해요. 엄살 같겠지만, 양평의 기업인들의 경제사정이 정말 제 앞가림하기도 힘들 지역입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은 수행해야 한다는 게 저뿐 아니라 모든 회원사의 마음가짐입니다. 내부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는 중이라 곧 좋은 대책이 마련될 거로 보입니다.</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지역기업의 활성화는 지역경제활성화와 동일한 의미라고 봅니다. 지역기업이 부흥하려면 맨 먼저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상위법 개선이 최우선이나 여기에만 매달렸다간 어느 세월에 해결이 되겠어요? 실현가능한 선에서 최우선은 지역정서와 의식의 변화라고 봅니다. 제도적으로 어렵다면, 법틀 안에서 기업 유치나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죠. 양평군청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뭐는 안 되고 뭐도 안 되고, 의 자세에서 벗어나,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된다, 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기업에 대한 관심이나 지원이 기업오너에 대한 특혜라는 그릇된 인식을 속히 버려야 합니다. 주식회사의 오너 역시 월급 받는 직원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물론 일반직원들보다야 급여가 많겠습니다만, 기업에 대한 지원이 누구 한 사람을 위한 게 아니고 더 많은 사람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고 또 실천해냈으면 정말 원이 없겠습니다. </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작년, 그러니까 쉰다섯에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사업과 학문을 병행하시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강하면에 줄 서서 사 먹는 칼국수집이 있어요. 모르긴 몰라도 순이익으로만 따진다면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훨씬 날 겁니다. 그런데, 돈 벌 욕심만 갖고 그 옆이나 앞에 칼국수집 차린다고 그집처럼 되겠어요? 우선 전문성과 애정이 있어야죠. 밀가루의 젤라틴 성분이 어느 정도 되어야 제일 식감이 좋고, 어느 정도로 익혀야 제일 맛있을 지를 귀신처럼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고려인삼을 전세계에 팔려면 당연히 저부터 인삼박사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다. 인삼을 모르고 어떻게 인삼을 연구하고 인삼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어떻게 우리 인삼을 자신있게 소비자에게 권하겠습니까?
돈만 벌려고 사업하면 망하기 십상입니다. 목적을 갖고 노력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는 겁니다. 명색이, 인삼제품 만드는 회사 책임자인데, 어떻게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복잡하고 미묘한 인삼의 성분과 기능을 좀 더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제 공부는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고려인삼연구주식회사 대표로서의 목표, 또 개인 신왕수의 목표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2011년 통계를 보면 전세계 건강증진식품 시장은 99조, 우리나라 생산규모는 1조 4천억, 그러니까 1.4퍼센트 점유율에 불과합니다. 우리 회사의 500억원은 그야말로 조족지혈입니다. 고려인삼연구주식회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도 멀다는 얘기입니다. 또 그만큼 뻗어나갈 길이 많다는 얘기이겠죠.
지금 고려대학교와 손잡은 획기적인 상품이 곧 출하될 예정입니다. 성공여부는 뒤로 하더라도, 매우 뿌듯한 성과라고 자부합니다. 자그마한 향토기업이 국내 굴지의 대학연구진과 공동으로 제품을 개발했다는 자체가 우리 회사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b>
신회장이 태를 묻은 데의 옛 지명은 어은(魚隱)골이다. 동네이름 참 기가 막히지 않은가. 물고기가 숨어들 만큼 외진 산골이라는 의미를 참으로 멋들어지게 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순간마다 한문교육의 필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되는데,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목청 높이는 족속들이 아직도 허다하니 이 또한 헛된 소망이리다.
신회장의 말에 따르면,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일대에 경북고령 신 씨가 집성촌을 이룬 지가 어언 400년이라고 한다. 어은공 신기한 선생이 성균관유생 시절에 이첨을 탄핵했다가 역공에 몰려, 강하면으로 숨어든 이후이다. 궁벽한 산골에 묻혀지만, 가문의 정기는 살아남아 조선말 이조, 예조, 형조 판서를 지낸 백파 신현구 선생을 필두로 승지공 신용우선생, 보은군수 신응, 문천군수 신면구, 독립투사 신창우 선생 등 숱한 역사적 인물을 배출해냈다.선산에서 발굴해낸 유품 여럿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전시되어 있음에도 정작 가문의 역사는 뿔뿔이 흩어져 켜켜이 먼지가 내려앉아 있다고도 한다. 신회장은 집안의 400년 역사를 정립하는 일을 필생의 작업으로 삼고 있다.
지금 양평에는 필생의 전략이 절실하다. 옛날에는 쌀 한말 먹고 시집가면 잘 사는 거였다는 기억에 사로잡혀 관대하기 짝이 없는 지역정서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말로만 기업유치,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활성화를 부르짖어서도 안 된다. 자전거 여행의 천국이니, 친환경농업의 메카니 따위의 슬로건만 요란해서도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냥저냥 시간만 흘려보내는 고질병을 이제는 사지를 절단하는 심정으로 싹둑 잘라내야 한다. 고질병이 양평의 온몸을 정렴하여, 기사회생의 시간마저 다 까먹기 전에 말이다.
그러나, 이렇듯 전대미문의 국가적 경사 속에서 양평의 기여도와 수확량은 얼마나 될까에 생각이 미치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고 만다. 규제법령에 몽땅 책임을 전가하는 건 익숙하고 비겁한 핑계일 뿐이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돌파구를 찾아내지 못한 결과 아니겠는가.
유독 양평에서만 향토기업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선뜻, 양평을 대표할 만한 기업이름을 내놓을 수가 없다. 엄연히 이곳 양평에도 기업인협의회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2013년 시월 마지막 날, 신왕수 양평기업인협의회장을 만났다. 거두절미하고 양평기업의 현실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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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양평에서 기업하시기가 어떠십니까?</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이 많습니다. 가장 큰 고초는 양평의 제반사항 자체가 反기업적이라는 점이죠. 물론 규제일변도인 국가정책에 가장 큰 책임이 있겠습니다마는, 지역정서나 행정관서의 마인드도 그다지 기업활동에 호의적이지 않아요. 그저 개인이 돈 벌려고 하는 일, 운영자 개인의 이익도모가 목푠데 뭐 때문에 도와주느냐 하는 정서가 지배적인 듯해요.
바깥에서도 양평은 아예 기업이나 공장은 설립할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교통편이나 땅값이나 수도권에서 양평군 정도의 조건이면 상위권인데 투자자본이 들어 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죠. 공장이라고 다 자연환경을 훼손하거나 관련법규를 위반하는 건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생적인 기업 설립도 매우 저조한 형편이구요.
지금 양평군경제인협의회 소속사가 46개사에 불과합니다. 이천은 말할 것도 없고 비슷한 여건의 여주와 비교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죠. </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양평기업인협의회회장의 입장에서 양평기업의 현주소를 짚어보신다면?</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짠해집니다. 그냥 슬퍼져요. 한 마디로 우군이 하나도 없는 적진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게 양평기업 대부분의 현주소입니다. 물론 각 기업 저마다의 경쟁력이나 전문성이 최우선이겠으나, 잠재력 높은 기업들조차 지역사회에서부터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양평보다는 서울에 있는 기업이 뭐가 나도 낫겠지 여기는 지역정서, 정당한 가격책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격이면 서울업체에다 맡기겠다는 그런 이상한 지역정서, 이런 게 아직도 만연해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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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긴 이상한 일이다. 타이틀도 애매한 대회에서 순위도 애매한 상을 타고서도 법석을 떨기 일쑤인 게 양평군의 습성인데, 어쩌자고 공인된 수상에는 그리 인색하게 굴었을까. 지역기업의 수확이 지역경제에 직결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공전의 베스트셀러를 읽어본 사람이 양평군청 안에 하나도 없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2007년도에 제 1회 경기도 농산물 수출 100만불탑을 수상하셨습니다. 창업에서 그 성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짧은 시간에 말하기 힘든 고난의 연속이었고, 가슴 벅찬 보람의 과정이었습니다. 96년도 고향땅 전수 3리에 부지 400평 공장 190평가량 규모에서 창업했는데, 사업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다 그랬겠지만 자신만만했어요. 아이템이 프로폴리스(꿀벌은 박테리아가 서식하지 않음에 착안하여, 1965년 프랑스 레미 쇼방이 발견한 천연항생제. 나무의 새싹이나 잎줄기 혹은 연한 가지의 자가 치료성분. 꿀벌은 이 프로폴리스를 모아 벌집의 구멍이나 틈을 막고 지붕을 고정시켜 외부의 오염을 막음) 였거든요.
그 무렵 일본에서 장수건강식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저는 지용성인 프로폴리스를 수용성으로 만들어서 좀 더 상품가치를 높이는 데에 주력했죠. 이것만 성공하면 내수시장은 물론이고 국제시장도 석권할 수 있다 자신했어요. 그런데, 상품개발이 구체화되던 창업 1년 만에 IMF가 터졌습니다. 탈탈 털어먹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더군요.
몇 달 좌절의 늪에 빠져 있다가 다시 힘을 냈죠. 이번에는 인삼을 택했습니다. 제가 83년도부터 인삼산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어느 분야보다 실패할 확률이 적어서였고, 건강증진식품이야말로 미래산업이라고 굳게 믿어서였죠. 한민족의 대표브랜드가 뭐겠습니까? 삼성이나 현대, K-POP 혹은 한류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래봐야 불과 몇십 년 안팎 아니겠습니까? 고려인삼은 2천년 전부터 변함없이 우리나라 대표브랜드이구요.
인삼 관련업체만 해도 국내에 850개를 헤아립니다. 또 수많은 외국기업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장에서 거의 막둥이인 후발업체이지만 기존의 업체들이 놓친, 기존의 업체들이 해내지 못한 부분을 죽어라 공략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관련업계나 관청이나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되고, 그게 또 자연스럽게 우리 고려인삼연구주식회사의 신용도를 올려주고 제품의 홍보를 해주게 되고, 당연히 매출로 이어지게 된 것이지요. 제 자랑, 아니 저희 회사 자랑 같아서 쑥스럽습니다만, 2004년 제 41회 무역의날 대통령으로부터 수출탑, 2007년 농림부장관으로부터 제8회 농식품수출탑, 경기도지사로부터 제1회농산물수출탑 등 중앙정부나 학계의 중요한 상은 안 받아본 게 없을 정도입니다.</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100만불탑 수상에서 6년이 흘렀습니다. 지금 사세는 어떠신지요? 많이 신장했겠지요?</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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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올해 350만불을 목표했는데, 400만불은 넘을 것 같아요. 내년쯤이면 농특산물 수출 500만불탑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b>
500만불이면 60억원이다. 대단한 성과이지만 처량한 규모이다. 이렇듯 힘든 지역기업풍토에서 그만큼의 수출을 해낸 것은 경이로울 지경이지만, 그 정도 금액이 양평기업을 대표한다는 건 씁쓸할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수출규모는 수직으로 솟구쳐왔다. 1964년 1억불을 돌파했고, 1977년 100억불을 달성했다. 지금 6000억불 수준에 도달해 있다. 1억불에서 6천억불, 불과 반세기 만에 6천배로 신장했다. 양평의 수출현황도 그랬으면 좋겠다. 고려인삼연구주식회사뿐 아니라 이 땅 양평의 기업들이 모두 그렇게 미친 듯이 신장했으면 좋겠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이 아이돌을 꿈꾸는 것처럼 허황한 소망이겠으나.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58년 양평에서 출생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유년의 기억이 많으실 텐데, 가장 생생한 기억을 꼽으라면?</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제가 태어난 강하면 전수리는 그야말로 벽지(僻地)였습니다. 물이 가로막고 산이 가로막는, 곡식 해먹을 반반한 평지마저 드물었구요. 자동차를 1년에 한 두대만 봐도 운이 좋았을 만큼 양평의 오지 중에 오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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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서울로 전학가지 전까지의 등굣길은 정말 산전수전이었어요. 산비탈을 타고 올라가서 바위타고 내려오고, 장마 때마다 떠내려가던 낙엽송 다리 때문에 노상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개울을 건넜습니다. 그때 국수리에 중학교가 생기지 않았으면 우리 동네 아이들은 전부 국민학교 졸업으로 끝났을 거예요. 곡물을 뱃삯으로 내던 나룻배가 지금으로 치면 스쿨버스였죠. 그때 사공하시던 분의 아들이 교회장로로 계십니다. 가끔 뵈면, 그때의 회상을 나누곤 하죠. 곱씹어도 진력나지 않는 추억입니다. </b>
필자 역시 나룻배의 추억을 지니고 있다. 요맘때처럼 하늘이 높고 푸르를 때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나룻배를 탔다. 어머니는 가을걷이 끝난 들판에서 감자며 고구마 이삭을 주어 겨울양식에 보태시곤 했다. 필자의 부친은 공직에 계셔서 그나마 중산층에 속했을 터인데, 그때는 그렇게들 살았다.
귀에 딱지가 앉은소리지만 불과 몇십년 전만해도 안 굶고 사는 게 극락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얼마나 뿌리가 깊은지, 그 시절을 견뎌낸 연령대의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는 터무니없이 너그럽다. 수출품에는 좋은 부자재를 장착하고서도 가격은 내수시장보다 헐하게 받는 국내자동차기업에도 관대하고, 노동조합을 원천봉쇄하는 데 혈안이 된 국내기업에도 관대하다. 유년시절보다 먹고살기가 훨씬 나아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가권력에 터무니없이 관대하다.
터무니없는 관대함은 국가권력이나 기업을 좀먹는 원인균임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관대함에 기생하는, 기업과 국가권력의 못된 버릇이 이토록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그 이후의 성장과정, 그리고 고향 양평에 회사를 설립한 배경도 궁금합니다.</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중3 때, 서울로 전학 와서 대학교까지 마쳤습니다. 직장생활 잘 하다가 문득 나만 해낼 수 있는 일을 해보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무언가 결과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믿음이 굳게 생기더군요. 직장생활에서 항상 좋은 평가를 받다보니 자만심이 없지 않은 듯도 합니다.
고향땅에 기업을 세웠으니 물려받은 거로 시작했겠지, 하는 주변의 눈이 많습니다만, 사실은 제 앞으로 된 척박한 땅 400평이 전부였습니다. 월급쟁이가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거의 맨손이다시피 시작해죠. 아까도 조금 밝혔듯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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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가정사도 순탄치가 않았어요. 거의 2년마다 한번 꼴로 대형 교통사고가 나는 거예요. 아들녀석 둘, 아내와 나, 큰 수술 여러 번 받았습니다. 특히, 아내는 전신마취수술을 8번이나 받았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게 나 혼자만 잘한다고 잘사는 게 아니며, 인간사가 인간의 힘만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주 늦어서야 깨달았어요. .
우리 회사 제품생산에 필요한 자재가 1000가지입니다. 그 1000가지를 공급해주는 사람들이 도와줘야 하고, 또 많은 관련기관에서 도와줘야 하고, 또 수많은 소비자와 바이어가 도와줘야 우리 회사가 굴러갑니다. 세상은 그야말로 도움의 네트워크 아닙니까?
저는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교회장로 일을 회삿일 만큼 챙깁니다. 인간의 힘만으로, 그렇게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도움을 주고받는 네트워크가 탈 없이 운영될 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저희 회사의 가장 중요한 채용조건은, 하나님은 믿지 않더라도 같이 예배를 볼 수 있는 겸손을 갖춘 자, 입니다.</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나눔 실천이라든가 지역사회활동이 매우 활발하십니다. 지역사회를 위한 지역기업인의 의무랄까 책무랄까, 여하튼 사회봉사 실천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시는지?</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지금은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해요. 엄살 같겠지만, 양평의 기업인들의 경제사정이 정말 제 앞가림하기도 힘들 지역입니다. 그렇지만,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은 수행해야 한다는 게 저뿐 아니라 모든 회원사의 마음가짐입니다. 내부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는 중이라 곧 좋은 대책이 마련될 거로 보입니다.</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지역기업의 활성화는 지역경제활성화와 동일한 의미라고 봅니다. 지역기업이 부흥하려면 맨 먼저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상위법 개선이 최우선이나 여기에만 매달렸다간 어느 세월에 해결이 되겠어요? 실현가능한 선에서 최우선은 지역정서와 의식의 변화라고 봅니다. 제도적으로 어렵다면, 법틀 안에서 기업 유치나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죠. 양평군청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뭐는 안 되고 뭐도 안 되고, 의 자세에서 벗어나,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된다, 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기업에 대한 관심이나 지원이 기업오너에 대한 특혜라는 그릇된 인식을 속히 버려야 합니다. 주식회사의 오너 역시 월급 받는 직원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물론 일반직원들보다야 급여가 많겠습니다만, 기업에 대한 지원이 누구 한 사람을 위한 게 아니고 더 많은 사람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고 또 실천해냈으면 정말 원이 없겠습니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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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작년, 그러니까 쉰다섯에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사업과 학문을 병행하시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강하면에 줄 서서 사 먹는 칼국수집이 있어요. 모르긴 몰라도 순이익으로만 따진다면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훨씬 날 겁니다. 그런데, 돈 벌 욕심만 갖고 그 옆이나 앞에 칼국수집 차린다고 그집처럼 되겠어요? 우선 전문성과 애정이 있어야죠. 밀가루의 젤라틴 성분이 어느 정도 되어야 제일 식감이 좋고, 어느 정도로 익혀야 제일 맛있을 지를 귀신처럼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고려인삼을 전세계에 팔려면 당연히 저부터 인삼박사가 돼야 하지 않겠습니다. 인삼을 모르고 어떻게 인삼을 연구하고 인삼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어떻게 우리 인삼을 자신있게 소비자에게 권하겠습니까?
돈만 벌려고 사업하면 망하기 십상입니다. 목적을 갖고 노력해서 그 목적을 달성하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는 겁니다. 명색이, 인삼제품 만드는 회사 책임자인데, 어떻게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복잡하고 미묘한 인삼의 성분과 기능을 좀 더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제 공부는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b>
<b><font color=green>안병욱 :</font> 고려인삼연구주식회사 대표로서의 목표, 또 개인 신왕수의 목표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b>
<b><font color=green>신왕수 :</font> 2011년 통계를 보면 전세계 건강증진식품 시장은 99조, 우리나라 생산규모는 1조 4천억, 그러니까 1.4퍼센트 점유율에 불과합니다. 우리 회사의 500억원은 그야말로 조족지혈입니다. 고려인삼연구주식회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고도 멀다는 얘기입니다. 또 그만큼 뻗어나갈 길이 많다는 얘기이겠죠.
지금 고려대학교와 손잡은 획기적인 상품이 곧 출하될 예정입니다. 성공여부는 뒤로 하더라도, 매우 뿌듯한 성과라고 자부합니다. 자그마한 향토기업이 국내 굴지의 대학연구진과 공동으로 제품을 개발했다는 자체가 우리 회사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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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회장이 태를 묻은 데의 옛 지명은 어은(魚隱)골이다. 동네이름 참 기가 막히지 않은가. 물고기가 숨어들 만큼 외진 산골이라는 의미를 참으로 멋들어지게 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순간마다 한문교육의 필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되는데, 사대주의의 산물이라고 목청 높이는 족속들이 아직도 허다하니 이 또한 헛된 소망이리다.
신회장의 말에 따르면,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일대에 경북고령 신 씨가 집성촌을 이룬 지가 어언 400년이라고 한다. 어은공 신기한 선생이 성균관유생 시절에 이첨을 탄핵했다가 역공에 몰려, 강하면으로 숨어든 이후이다. 궁벽한 산골에 묻혀지만, 가문의 정기는 살아남아 조선말 이조, 예조, 형조 판서를 지낸 백파 신현구 선생을 필두로 승지공 신용우선생, 보은군수 신응, 문천군수 신면구, 독립투사 신창우 선생 등 숱한 역사적 인물을 배출해냈다.선산에서 발굴해낸 유품 여럿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전시되어 있음에도 정작 가문의 역사는 뿔뿔이 흩어져 켜켜이 먼지가 내려앉아 있다고도 한다. 신회장은 집안의 400년 역사를 정립하는 일을 필생의 작업으로 삼고 있다.
지금 양평에는 필생의 전략이 절실하다. 옛날에는 쌀 한말 먹고 시집가면 잘 사는 거였다는 기억에 사로잡혀 관대하기 짝이 없는 지역정서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말로만 기업유치,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활성화를 부르짖어서도 안 된다. 자전거 여행의 천국이니, 친환경농업의 메카니 따위의 슬로건만 요란해서도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냥저냥 시간만 흘려보내는 고질병을 이제는 사지를 절단하는 심정으로 싹둑 잘라내야 한다. 고질병이 양평의 온몸을 정렴하여, 기사회생의 시간마저 다 까먹기 전에 말이다.
YPN뉴스 (ypn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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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공감님의 댓글
공감 작성일시장상인하고 농업인은 지원해주는게 맞고
회사하는 사람은 조금만 도와줘도 특혜니 머니 시비거는게 맞으니
양평에서 기업을 운영하는게 진짜로 어렵다
되도않는 대운동장 만든다고 난리법석칠게 아니라
그돈으로 기업도 쫌 육성해라~~
공감백배님의 댓글
공감백배 작성일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거늘 어찌 곳간은 비우고 운도장에서 자전거나 타고 놀려하는가. ㅉㅉㅉ
구멍가게님의 댓글
구멍가게 작성일두분의 말씀 참으로 정말 짠합니다.
저도 쬐그맣게 구멍가게 하는 사람인데요!
서로 서로 바뻐야 남이 잘되든 못되든 신경 안쓰는데
내가 너무 너무 한가하다보니 내 걱정보다는
내가 잘안되고 있으니 남이 잘되면 안되는데 걱정하는
그런 환경에서 정말 대단한 회사로 키우셨읍니다(축하드립니다.)
김선교올림님의 댓글
김선교올림 작성일존경을드리는 댓글자 분들 언제든지 경청 하겠습니다. 만나서양평발전 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실명으로 남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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